엄마의 서재 2, 첫 이야기
제주의 새벽 공기가 문장처럼 스며들었다. 창문 너머로 아직 덜 깬 바다의 숨결이 밀려들었고 방 안에는 아이들의 고른 숨소리가 잔잔히 깔려 있었다. 나는 그 고요를 깨지 않으려 애쓰듯 천천히 책을 펼쳤다.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
책장을 덮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맴돈 한 문장. “우리는 단 한 번의 삶을 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 섬으로 오기까지의 길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었다. 익숙했던 도시의 안락함을 뒤로하고 제주를 택한 단 한 번뿐인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나의 대답이었다.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건 좋은 성적표나 안정된 궤적이 아니라, 다른 길을 선택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증거였다.
"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처음에는 인물도 낯설고, 상황도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씩 짐작하게 된다. 갈등이 고조되고 클라이맥스로 치닫지만 저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무슨 이유로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고, 영원히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 무겁게 남아 있는 채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바로 그런 상태로 우리는 닥쳐오는 인생의 무수한 이벤트를 겪어 나가야 하고 그리하여 삶은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도 어떤 부조리로 남아 있게 된다. 이 부조리에다 끝내 밝혀지지 않은 어떤 비밀들, 생각지도 않은 계기에 누설되고야 마는 굳이 숨길 필요도 없어 보이는 사소한 비밀들까지 더해진다."
나는 그 비유가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모든 순간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결국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그 안에서 작은 의미를 발견한다. 우리는 매 장면을 지나가며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 하고 그 장면 하나하나가 단 한 번뿐인 삶의 스크린에 각인된다.
또 다른 문장은 내게 지금의 시간을 더 분명하게 각인시켰다.
“우리가 살지 않은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미래에 나쁜 결과와 마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다.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갈망은 그 어떤 전략적 고려보다 우선하고, 살지 않은 삶에 대한 고찰은 그런 의미를 만들어내거나 찾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다.”
만약 제주로 오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안락하지만 답답한 방 안에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살지 않은 삶’을 상상하는 순간, 지금 내가 살아내는 이 시간의 의미가 더 분명해졌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제주의 오늘이야말로 내가 선택한 단 한 번의 삶이라는 것.
“삶을 사유하다 보면 문득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토록 소중한 것의 시작 부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시작은 모르는데 어느새 내가 거기 들어가 있었고, 어느새 살아가고 있고, 어느새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소설이나 영화는 시작 부분에 공을 많이 들인다. 첫인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삶이라는 이야기에는 첫인상이랄 게 없다. 숙취에 절어 깬 아침 같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 기분. 내 삶의 서두는 기억이 나지 않는 반면, 나와 무관한 다른 삶들은 또렷하고, 그것들은 대부분 소설이나 영화에 담겨 있는 것들이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오래 머물렀다. 언제부터 엄마가 되었는지, 언제부터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는지, 심지어 언제부터 제주를 동경했는지도 분명치 않다. 다만 어느새 그 안에 들어와 있었고 어느새 살아가고 있으며, 어느새 끝을 향해 걷고 있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다. 시작은 희미해도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내느냐가 결국 나의 삶을 정의할 것이다.
제주의 바다는 늘 같은 자리에서 밀려오고 물러가지만 그 파도는 한 번도 똑같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돌담길을 걸으며 깨닫는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이 장면 또한 다시 오지 않을 단 한 번의 풍경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더 소중히 바라보려 한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내라는 이름으로, 늘 타인의 시선을 먼저 의식하며 살아왔던 내가 이제야 조금 자유로워졌다.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삶은 누구에게나 유일한 기회다. 그렇다면 나는 이 기회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글쓰기는 내 단 한 번의 삶을 증언하는 방식이고 브런치북은 그 흔적을 담아낼 그릇이다.
제주에서 보내는 이 시간은 언젠가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그 끝은 두려움이 아니라 나의 삶이 단 한 번 뿐이라는 것을 더 강렬히 자각하게 만드는 순간일 것이다. 책이 알려준 사실 그리고 내가 매일 마주하는 제주의 풍경이 전해주는 가르침은 같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살아내라.”
나는 이제 단 한 번의 삶을 제주에서 아이들과 그리고 글과 함께 살아내려 한다. 이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순간들이 내 삶의 문장이 되어 언젠가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