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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살이 중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느림의 미학

by Remi

가을의 바람이 창문을 살짝 밀고 들어온다.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따뜻하지만 공기 속엔 서늘한 냄새가 묻어 있다. 커튼 끝이 가볍게 흔들릴 때

가장 먼저 그 변화를 알아차리는 건 아이들이다.


“엄마, 바람이 냄새 나. 나뭇잎 냄새.”

그 한마디에 나는 웃음이 났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지만

이 계절의 속도만큼은 천천히 흘러간다.


그 속에서 나는 아이들과 함께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배우고 있다.



제주에 와서 아이들은 더 자주 멈춘다.
길가의 들풀 하나에도 이름을 붙이고
풀숲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한다.
‘내가 잃어버린 건, 이 시간들이었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웃음소리,

손끝에 닿는 바람,

아이들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내 마음을 다시 살게 하는 일이다.


제주는 아이들을 바꾸어 놓았다.

파도에 젖은 신발을 보며 깔깔대던 웃음,

손에 쥔 조약돌 하나에도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눈빛.

그 속에서 나는 다시 배운다.

삶의 속도를 늦추면, 마음의 결이 살아난다는 것을.


세상은 여전히 우리를 재촉하겠지만

나는 아이들이 멈춘 자리에서

함께 서보려 한다.




떨어지는 꽃잎 하나에 감탄하고,

짧은 인사에 마음을 담으며

아이들과 손을 맞잡고 걷는 그 순간

이 모든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가장 아름다우며

나를 회복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삶이라는 테트리스에서 우리는 조각을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조각을 어떻게 배치할지는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다. 감정을 다잡고, 태도를 정돈하며, 하루를 살아내라. 그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쌓이면 삶은 서서히 정리되고 마음은 단단해진다.

-이해인의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 중-


좋은 삶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아이들과 함께 쌓아 올린 오늘의 조각들이

결국 나의 인생을 완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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