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의 뜨개바늘

by 따뜻한 다경씨

노란 목도리를 드디어 완성했다. 길게 펼쳐놓은 모양이 금빛 물결처럼 출렁인다. 긴 목도리를 두어 번 접어 딸아이 방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촘촘히 짜인 포근한 감촉. 온기가 스며든다.


다가올 시험으로 인해 날카로워진 딸아이와의 실랑이로 지쳐 갈 무렵, 옷장 깊숙이 넣어 둔 뜨개바늘이 생각났다. 가지런히 꽂힌, 굵기 다른 대바늘들. 그 중 하나를 뽑아 작년에 몇 줄 뜨다 만 목도리를 풀어 실을 검지에 감았다. 몸통부터 실이 풀려 나오면 금세 단면들이 만들어진다. 희한한 것은 대바늘 두 개에 실이 맞물려 걸릴 때마다 실랑이는 공 구르듯 풀려버린다.


외할머니도 그랬다. 큰 외숙모와 실랑이가 벌어질 때마다 뜨개바늘을 잡았다. 그럴 때면 꼭 실이 아니라 한숨을 엮는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손 위로 바닷물 같은 고단함이 수시로 넘나들었다. 거무튀튀한 손등, 삐져나온 굵은 핏줄, 세찬 물살에 부딪쳐 고요할 틈 없던 손가락. 그 사이사이를 실이 빠져 나가면 한 올이 그물처럼 앞 코에 걸린다.


큰 외숙모는 술만 취하면 외할머니에게 달려들었다. 맺힌 한을 원 없이 쏟아내야 직성이 풀렸다. 어떤 때는 마당 한복판에 퍼질고 앉아 할머니가 애써 뜬 스웨터를 한 올 한 올 남김없이 뜯어 낸 적도 있다. 실들이 마당 여기저기로 산발하듯 흩어지면 그제야 잠이 들었다.


외할머니는 육이오 전쟁 때 큰 외삼촌을 잃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워 만든 스웨터가 마지막 선물이었다. 국군이 마을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후 뜨개바늘은 바빠졌다. 외할머니는 양쪽 검지가 피멍이 들도록 쉼 없이 바늘을 움직였다. 잠시도 엉덩이를 바닥에서 떼지 않았다. 몰려오는 불안감이 바늘 코에 걸려 다가오지 못하도록 주문이라도 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둠이 무섭게 서 있던 눈 오는 새벽, 큰 외삼촌은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먼 길을 떠났다. 외할머니가 정성스레 만든 짙은 초록 스웨터를 입고. 외할머니는 짐작했을까.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는 것을.


큰 외삼촌은 교사였다. 공산주의에 물든 큰 외삼촌은 육이오가 일어나던 그 해 인민군이 되었다. 칠포 백사장까지 상륙한 인민군과 합류하다 반격해 온 국군을 피해 고향집인 월포리 용산의 솔바위 근처에 숨어 있었다. 외할머니는 이웃들 몰래 불빛이라곤 달빛뿐인 산등성이를 얼마나 많이 넘어야 했을까. 무섬증보다 자식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언덕을 수없이 넘게 했을 것이다. 월포리 턱밑까지 국군이 몰려오던 날 외할머니는 큰 외삼촌을 보냈다.


큰 외숙모는 오랜 세월 외할머니를 원망했다. ‘아기 얼굴이라도 보여 주었으면’ 하는 말을 수없이 되뇌며 울었다. 큰 외삼촌이 떠나던 전날 밤 큰 외숙모는 아기를 낳았다. 어쩌면 큰 외숙모는 손가락사이로 미끄러지는 털실만 아니었으면 큰 외삼촌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조각 난 세월 앞에 두 사람은 한 코도 맞물리지 못한 채 꼬이고 엉켜만 갔다.


외갓집은 바닷가였다. 마당을 들어서면 비릿한 그물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햇살에 그물이 부서지듯 반짝인다. 그물은 새벽녘 젖은 인연들을 햇살에 토해내는 중일 것이다. 슬픔을 말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날마다 그물망 사이를 바느질하며 그날을 생각했을 것이다. 외할머니의 뜨개질은 기다림이었다. ‘다시 오겠다’는 그 약속을 수없이 뜨개바늘로 잇고 맞대었을 것이다.


해녀였던 외할머니. 한 평생 물질을 하며 바다 속을 넘나들었다. 쉼 없이 파도를 풀었다 꿰맸다 하느라 얼마나 고단했을까. ‘차라리 재가라도 했으면 꽃다운 시절 한이라도 덜 맺힐 텐데. 저 맺힌 응어리를 어쩌면 좋누.’ 매듭짓지 못한 마지막 그 한 올이 외할머니에게는 시리도록 차갑고 아팠을 것이다.


‘나 죽거든 꼭 우리 어무이 곁에 묻어줘.’ 큰 외숙모의 유언은 뜻밖이었다. 외할머니 임종마저 외면했던 큰 외숙모. 쉼 없이 실을 뜯고 풀어냈지만 살아생전 얼마나 촘촘히 그 실을 잇대어 닿게 하고 싶었을까. 창문에 햇살이 하나 둘 아른거리다 흩어진다. 큰 외삼촌의 환영이라도 본 것일까. 원망이 서서히 펴지며 큰 외숙모는 외할머니가 남긴 마지막 한 올을 마무리했다. 큰 외삼촌이 떠났던 그 해 겨울처럼 마당에는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렸다.


몇 해 전 봄 외할머니를 만났다. 살아생전 좋아하던 진달래꽃이 무더기무더기 피어나 있었다. 큰 외숙모 무덤가에도 새색시처럼 고운 진달래꽃이 많이 피었다. 하얀 면 보자기에 분홍 물을 들인 듯 고왔다. 마치 스물여섯 외숙모가 외할머니 손잡고 수줍게 웃고 있는 것만 같다. ‘할머니는 참 좋겠네. 큰 외숙모 있어서 하나도 안 심심하겠다.’ 외할머니와 큰 외숙모 넋이 분홍치마 너울대며 돌아오듯 천천히 멀어진다.


외할머니도 없는 외갓집을 뜨개바늘이 움직인다. 뜨개바늘이 하얀 햇살에 온기를 건지는 그물망처럼 한 땀 한 땀 잇대고 있다. 윤나도록 눈부신 장독, 마당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하늘색 수국, 외할머니 없는 여백을 매워주는 뒤란의 나팔꽃. 뜨개바늘이 그것들을 수놓듯 촘촘히 빚어내고 있다. 뜨개바늘은 또 무엇을 닿도록 이을까.


바구니에 뜨고 남은 실이 서로 걸치듯 흩어져 있다. 딸아이와의 실랑이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뜨개질을 하는 것은 실을 짜내는 것이 아니라 엉킨 생각을 풀어내는 것이 아닐까. 할머니의 유품이 그리울 때 쯤 나는 또 내 마음의 그 무엇을 맞닿게 할 생각을 잔잔히 풀고 있을지 모르겠다.


커버 사진 출처 : https://blog.naver.com/s2omm/12020760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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