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과 직업과 취미

by Renaissance

재능은 타고난 능력을 일컫는다. 남들은 어렵게 하는 걸 쉽게 하는 것. 친구랑 거의 붙어있으며 똑같이 공부를 안 했는데 누구는 성적이 잘 나온다. 체육시간에 새로운 운동을 배우자마자 잘하는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러하듯, 재능에도 급이 있다. 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압도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존재한다. 보통 이런 사람을 우리는 천재라고 하고, 천재는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갈고닦아 그것으로 먹고살게 된다. 직업이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직업으로 삼을 만큼의 재능이 안 되는 경우는 어떤가?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내가 최고가 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내가 먹고사는 것이 힘들어질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내가 재능 있는 분야를 직업으로 삼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내가 재능이 없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든, 나보다 재능 있는 사람과의 경쟁에서 처절한 패배를 맛보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재능이 있는 분야를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찾는다. 엘리트 체육을 지향하는 한국에서 어렸을 때부터 엘리트 체육인으로 자란 사람 중에 이런 케이스가 많다. 내가 직업으로 삼으려는 분야가 코딩이라면 프로그래머 수요는 매우 많으니 어떻게든 직업을 삼을 수 있겠지만 엘리트 체육인의 경우 실업팀에 소속될 수 있는 선수의 수는 극히 적다.


어떤 직업을 선택하는 데 있어 재능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재능이 없어도 충분히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앞서 설명한 재능의 급을 달리 해석해서 그렇다. 본인에게도 재능이 있어서 그 직업을 선택한 것인데 괴물 같은 재능을 소유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자신에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본인이 재능이 아예 없었다면 그 직업을 선택했을 확률은 0에 수렴한다. 취미에 대입하면 이해하기가 편하다. 취미는 직업과 다르게 본인의 인생을 걸어서 남들과 경쟁해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취미를 고름에 있어 재능을 떠올리는 이는 별로 없다. 하지만 취미에도 재능이 필요하다. 수영에 재능이 아예 없고 물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수영선수의 멋진 스트로크를 보고 감명받아 수영장에 등록했다고 치자. 수영이 그 사람의 취미가 될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똑같이 입문수업을 들었는데 남들은 자유형으로 25M를 가고 있는데 본인은 여전히 물에 뜨는 것조차 힘들다면 다음 달 수강을 안 하게 된다. 아무리 재능이 없다고 해도 한 달을 배우면 물에 뜰 정도는 되어야 그게 취미가 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는 거다. 아예 재능이 없는 분야를 미친 듯이 파고들어서 자신의 취미로 만들고야 마는 사람은 그 끈기를 재능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사람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취미가 생기는 과정은 그 액티비티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시도해 보았더니 그렇게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게 되고, 더 잘하고 싶어서 계속하는 케이스다. 시작할 때부터 어느 정도 재미를 느끼니까 하는 거다. 배워보고 싶어서 원데이 클래스나 한 달 등록을 해놓고 다시는 쳐다보지 않는 액티비티가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시작하자마자 재미가 있다는 건 그 분야에 재능이 있다는 뜻이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놀다가 영화를 하기로 마음먹은 후에 단편 영화를 찍고 장편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 학교에 들어가기까지가 1년 걸렸다. 내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서 영화에 뛰어든 게 아니라 영화를 찍고 싶어서 단편을 찍었고 계속해보고 싶어서 영화 학교에 지원한 것이다. 나에게 재능이 없었다면 이렇게 빠른 시일에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장편 영화도 찍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능에도 급이 있는 법, 먹고살고는 있지만 종합소득세 신고를 매우 간편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벌이가 시원찮고 여전히 신인감독 취급을 받고 있다. 내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던 분야는 미술이다. 유치원 때 전국대회 1등을 했고 초등학교에서도 사생대회 대표는 항상 나였다. 초등학교 5학년때 처음 미술학원을 다니게 되었는데(유치원도 이름은 미술학원이었지만 미술학원 이름을 단 유치원이었으니) 첫 수업으로 하얀 공을 데생으로 그리게 했다. 내 그림을 보신 선생님은 갑자기 과일 바구니를 그려보라고 하셨다. 남들은 원기둥 따위를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나는 과일바구니라니. 다음날부터 나는 미대 입시반에서 그림을 그렸다. 아직도 그 창피함이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형 누나들과 함께 다비드상을 그리면서 내 형편없는 다비드가 창피했던 기억이. 지금 생각하면 입시반의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나는 얼마나 귀여워 보였을까. 내가 창피할 필요는 하나도 없었는데. 부모님의 격렬한 반대로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미술을 못 하게 되었는데 내가 재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분야는 이런 게 아닐까 한다. 지금도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림은 역시 재밌다.


내가 재능이 없는 분야 중에 재능을 가지고 싶은 분야는 음악이다. 음악적 재능이야말로 가장 유용한 재능이 아닐까 한다. 나도 한때는 노력으로 재능을 넘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나는 피아노도, 기타도 일정 수준으로 올라서지 못한다. 내 노력이 미천해서 그렇다고 말한다면 부인하지 않겠다. 화성학을 공부도 해봤지만 내가 자유 연주를 하게 되는 모습이 그려지지가 않는다. 피아노를 친다면 코드에 맞춰 자유 연주를 할 수 있어야, 기타는 솔로 연주를 할 수 있어야 그 악기를 제대로 다루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되어야 진정으로 잼(합주)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기타는 밴드도 해보고 내가 작곡한 코드로 노래도 만들어보고 했지만 기타 솔로를 못 치니 내가 작곡해 놓고 남에게 기타 연주를 맡기게 되더라. 그런 경험이 쌓이니 역시 나에겐 음악적 재능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악기를 취미 삼아하는 사람을 보면 너무 부럽다. 보통 한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은 다른 악기도 금방 배운다. 음악적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선율에 대한 캐치도 빠르고 한 음 다음에 어떤 음이 와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안다. 음악이야말로 반드시 직업으로 삼을 필요 없는 분야 아닌가. 취미로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게다가 나이가 들어 몸이 노쇠해질 때까지도 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한 취미가 있으랴. 애석하게도 나에겐 그런 재능이 없다.


한 때는 복싱이 취미였고, 한 때는 서핑이 취미였지만 몸을 쓰는 운동은 취미로 할 수 있는 기간이 길지가 않다. 이제는 달리 취미라고 할 수 있는 게 그림밖에 없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길거리 피아노 연주 영상을 보여줬는데, 길을 지나던 사람이 갑자기 가방에서 바이올린을 꺼내 들고 피아노와 함께 즉흥 합주를 하는 모습을 보며 미친 듯이 부러운 마음에 끄적여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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