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enaissance Jun 30. 2024

상반기 끝 feat 성취감

상반기의 마지막 날이다. 2024년의 반이 지나갔다. 상반기를 돌이켜 보니 한 게 없다. 그냥 아팠을 뿐이다. 


2024년 현재까지 계약 건수는 0건이다. 영화와 드라마가 모두 힘들다지만 나와 비슷한 커리어의 주변 감독들 중 계약을 하고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존재한다. 시리즈 작가 계약과 영화 기획개발 계약이다. 투자가 힘들어도 개발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불공정한 계약이어도 했어야 했을까. 까칠하게 굴지말고 갑질에 그냥 네네 거렸어야 했을까. 돈을 받지 않고도 영화를 찍었어야 했을까. 잘못한 것이 없는데 결과가 안 좋으니 잘못할 것을 찾아야 하는 느낌. 


놀이터 모래밭에 동그라미를 그어넣고 깃발을 꽂은 후 독립국가를 선포하는 아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영화감독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의뢰 없이 혼자서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쓰고 있는 모습이 모래밭의 아이와 다를 바 없다는. 독립장편 이외에는 스크립트를 팔아본 적이 없는데, 내가 과연 영화감독이 맞는 것인가. 목표없이 살 수 없고 성취감을 무엇보다 좋아하는 내가 선택한 것은 게임이다. 


유튜버 대도서관이 100분 토론에 나와 게임의 효용성을 주장할 때 성취감을 말했다. 학업에서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운 아이들이 게임을 통해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고. 성취감을 느끼는건 교육에 좋은 거라고. 그때는 동의하지 못했다. 게임이 아닌 더 건설적인 행위를 통해 성취감을 느끼는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운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생각해보니 내가 오만했다. 관심사가 생겨 도전하게 되는 일에 금방 성취감을 느꼈던 삶을 살았으니 그딴 오만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이가 들고 에너지가 줄어들자 게임을 그렇게나 싫어했던 내가 게임을 주구장창 한다. 그렇게 재미도 없는데 왜 나는 게임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내가 삶에서 너무 오랫동안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더라. 역도에 심취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록이 1키로만 늘어도 엄청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목표지향맥시멈 운동이 역도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기록 향상에 한계가 오고 몸까지 아프니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게 게임밖에 없더라. 


그럼 독서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올해 상반기 아팠던 것을 제외하고 액티비티 만 정리해보면 역도, 게임, 독서로 요약할 수 있다. 실제로 그 세개 말고 한게 없는 것 같다. 역도와 게임을 성취감에 대한 갈증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독서는 무엇일까. 내가 이만큼 두꺼운 책을 읽었어, 따위의 성취감을 위해 독서를 하는건 아닐테다. 내가 중학생도 아니고. 두껍고 어려운 책을 읽고 성취감을 느꼈던 시기는 20대 초반에 끝났다. 어떤 책을 읽고 그것을 졸업했는지 기억도 난다. 괴테의 파우스트다. 그 책을 완독한 후, 이제 더이상 어려운 책이나 두꺼운 책을 읽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후로는 재미가 없으면 그냥 다른 책을 읽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게 했고, 두껍고 어려운 책이 재밌어진건 30대 후반에 들어서다. 늦게도 성숙했다. 지금은 성취감이 아니라 재밌어서 책을 읽는데, 수많은 액티비티 중에 유독 독서를 계속적으로 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나는 안 하지만 남들이 지속적으로 하는 행위를 생각해보면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 유튜브 시청, 쇼츠나 릴스 시청 등이다. 전자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행위고, 후자는 단순 유흥이다. 나는 소속감에 목메는 사람이 아닌 건 알겠는데, 왜 유튜브나 숏폼을 즐기지 않는 것인가. 왜 책이 더 재밌다고 느끼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안정감이 아닐까 한다. 


안정은 판타지라고 생각했다. 온갖 불합리함을 겪거도 대기업을 그만두지 못하는 친구들이 토로하는 것이 안정감이다. 그만두면 불안하다는 것. 40대만 되어도 잘릴 걱정을 해야 하는게 무슨 안정이냐고 아무렇지 않게 그만둔 나를 모두 신기하게 쳐다봤다. 실제로 지금까지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는 친구들은 모두 자리 걱정을 하는 중이다. 고작 10년의 안정감을 위해 하고 싶은걸 포기하고 회사에 충성했던 것이다. 그래서 안정은 판타지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안정감은 인간에게 중요한 감정이다. 내가 책을 다른 행위보다 선호하는 이유는 안정이라는 판타지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고전 문학을 읽으면 내가 그래도 무언가 성장하고 있는 것이라는 착각, 내 문학 감수성이 깊어지고 있다는 착각, 창작자로서 양식이 쌓이고 있다는 착각. 이게 무시못할 수준이기 때문에 굳이 도파민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영상 매체보다 책을 탐톡하고 있는게 아닐까. 내 성격을 생각한다면 이게 옳은 해석인 것 같다. 


슬슬 노안이 오고 있다. 내 신체는 전성기를 지나 빠르게 쇠퇴하고 있다. 영화감독들은 평균적으로 40대에 자신의 최고 걸작을 찍는다. 지금 당장 영화 기획개발 계약을 한다고 해도 아마 5년 후에나 개봉할 것이다. 30대 상업데뷔가 목표였지만 40대 상업 데뷔조차 장담하지 못하게 되었다. 책과 게임을 통해 안정감과 성취감을 느낄게 아니라 커리어를 다시 재설정하는 것이 옳은게 아닌가 싶다. 답을 알고 있지만 놓지 못하는 것은 집착으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상반기 결산 끝. 

작가의 이전글 극단적 엄숙주의 시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