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

영화 말고

by Renaissance

분노를 표출할 곳이, 생각을 표현할 곳이 필요해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해놓고 맨날 우울한 주제만 생각나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가 처음으로 우울한 감정을 느껴본 것은 20대 후반, 취업준비생 시절이다. 자신이 있었기에 원하는 회사 네 개에만 이력서를 냈다가 다 떨어졌고, 첫 불면증을 겪었다. 불면을 술로 극복해 보려다 마음을 다잡고 인턴을 시작했고, 세 개 회사에 연달아 인턴을 하면서 우울감을 처음 느꼈다. 우울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우울증은 하루종일 비탄에 젖어있는 사람이니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고,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집에 와서 잠자리에 들면서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세상이 끝나있길 바라는 정도였다. 그리고 우울증 선배와 이야기를 하다가 깨달았다. 나 우울증 맞네.


어렸을 때부터 뭔가 어둡고 어딘가 이상한 친구들이 우울할 때 나를 찾곤 했다. 내가 굿 리스너라고 하면서 자신의 우울한 감정을 털어놓곤 했는데 내가 우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 보니 그냥 힘내라, 운동을 해라 등 도움이 안 되는 말만 했다. 내가 우울증 선배라고 부르는 친구는 사춘기 시절부터 우울증을 겪어온 친구였는데 기분이 바닥을 쳤을 때 나에게 기댄 적이 있다. 오래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부탁했던 역할이었는데 헤어진 직후라 마땅한 존재가 없었으리라. 나는 병약한 소리 한다면서 그 친구를 꾸짖었다. 그 친구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 말이었을지 평생 모를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나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왔고, 그 친구에게 석고대죄했다. 우울이라는 감정이 이런 건지 정말 몰랐다, 그때 나의 발언을 용서해 달라. 그 친구는 쿨하게 용서해 준 척하면서 틈만 나면 그 발언을 꺼내서 안주거리로 삼았다. 나에게 몰려들었던 우울한 친구들은 그럼 내가 미래에 우울증을 겪게 될 것을 미리 알아본 것일까? 어떻게 우울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나에게서 우울을 찾아냈을까?


예술인을 대상으로 해주는 무료 심리상담을 통해서 우울증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는데 우울증은 유전이라고 한다. DNA에 우울 인자가 각인되어 태어난 사람이 우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살다가 인자가 발현되는 순간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우울증이라는 늪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억울하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닌데 우울 인자를 가지고 태어나다니. 왜 내 조상님 중엔 우울증 환자가 있었단 말인가. 알고 보니 정신병의 상당수가 유전이라고 한다. 심지어 사이코패스도 유전이다. 유전인자가 발현되고 않고는 랜덤게임인데 후천적 환경이 중추적 역할을 하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나에게도 취업 실패라는 명확한 트리거가 존재했고, 내 우울증 선배는 사춘기 시절 가정의 불화가 트리거였고, 또 다른 우울증 친구는 부모님의 차별대우 때문에 어려서부터 우울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최근에 우울 인자가 발현된 지인은 사업 파트너의 배신 때문이었다. 본인이 우울증을 겪게 될 것이라고 40년 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까지 갈 필요도 없이 우린 유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까지 유전인 경우가 많다. 담배를 피우는 건 후천적 환경 요인이겠지만 끊는 건 유전의 영역이다. 니코틴 저항력이 센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담배를 쉽게 끊는다. 카페인도 마찬가지로 저항력이 센 유전자가 있고, 그런 사람들은 카페인 중독에서 쉽게 벗어난다. 알코올, 술도 마찬가지다. 중독과 관련된 것은 모두 유전과 관련이 있다고 보면 된다. 내가 쉽게 끊는다고 끊지 못하는 사람에게 의지력이 약하다는 둥 하면 안 되는 거다. 비만이 유전인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단맛을 민감하게 느끼는 것도 유전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단맛 민감도가 낮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면 남들보다 단맛을 잘 느끼지 못하고, 따라서 더 달게 먹게 된다. 그런 사람은 비만이 될 확률이 매우 높고 당뇨 또한 그렇다. 당뇨는 대표적으로 유전이 되는 질병이지만 요즘은 배달음식에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설탕량 때문에 당뇨 가족 내력이 없는 사람도 당뇨에 많이 걸린다고 한다. 먹는 양도 유전이라 비만은 이래저래 유전의 영향이 크다. 악력도 유전이다. 철봉을 잘하는 사람인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지는 거다. 충격적인 것은 노화와 수명도 유전이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사람은 조상님께 감사해야 한다. 관리를 잘하는 것보다 타고난 것이 더 중요하다. 내 수명은 증조부모님과 조부모님이 언제 돌아가셨는지를 보면 대강 예측할 수 있다.


생각보다 유전에 기인한 것이 많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억울한 측면도 있을 것이고, 마음의 위안을 주는 측면도 있다. 니코틴 의존도가 높은 사람은 본인이 금연을 못 하는 것을 유전 탓으로 돌릴 수 있다. 하지만 강한 의지력으로 끊어내는 사람이 있고, 이 의지력만큼은 유전이 아니라 본인의 노력이니 너무 위안삼지는 말자. 키에 대입해 보면 쉽다. 키가 유전인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키가 더 크지 못한 것이 아쉽고, 키가 컸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상상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주어진 키를 가지고 최대한의 결과를 만드려고 노력한다. 다른 모든 유전도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좋지 않을까. 참고로 난 비만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요요 유전자도 있다. 실제로 어렸을 때 소아비만이었고 초등학교 중학교 별명이 돼지였다. 고등학교 때 살을 뺐고 그 후로 몇 번 찌기는 했지만 절대 중학교 때 몸무게로 돌아간 적은 없다. 말랐다는 얘기를 듣고 산지가 거진 20년이 되었고, 유전자검사를 통해 나에게 비만인자와 요요인자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지금까지 살을 빼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 느낀 적은 없다. 내 가족 중엔 예술가가 없지만 난 예술을 하고 산다. 우울인자가 발현되어서 슬프지만 오늘도 난 헬스장에 가서 웨이트를 들었고, 내일도 데드리프트를 뽑아 올리며 포효할 것이다. 태어났으니 살아갈 수밖에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나가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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