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이라는 환상

by Renaissance

세계관에 대한 썰을 더 풀어보려고 한다. 요즘 새로 만나는 제작자 분들이 모두 세계관에 꽂혀있다. 모든 제작사가 새로운 세계관 기획 아이템을 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관을 매력적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기 때문이다. 마블, 스타워즈,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끊임없이 컨텐츠를 만들어내고 있다. 한국의 마블, 한국의 스타워즈를 만들기만 하면 엄청난 수익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만들 수만 있다면 말이다.


매력적인 세계관을 만드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몇 장짜리 기획서로 세계관을 만들려는 시도를 수도 없이 보아왔다. 몇 장짜리 기획서로 매력적으로 보이는 세계관은 나도 쓸 수 있다. 하지만 그 세계관으로 영화를 만들고 시리즈를 만들고 웹툰을 만들고 책을 만들어도 재밌을지는 별개의 이야기다.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영화들은 많고, 대부분의 영화는 한 편으로 끝나거나 후속 편 한두 편이 더 나왔을 뿐이다. 스타워즈는 굉장히, 너무나 드문 케이스다. 지속적으로 실패하지만 계속 후속 편이나 리부트가 시도되는 시리즈의 대표작이 터미네이터인데, 제임스 캐머론 감독이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수익을 많이 내는 감독이기에 시도되는 특이 케이스로 보면 된다. 왜 어떤 세계관은 계속 영화가 나와도 성공하고, 어떤 세계관은 한 두 편 만에 실패할까?


위에 열거한 가장 성공적인 세계관들의 공통점은 스타워즈를 제외하면 원작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마블은 수십 년간 발행된 몇천 권에 달하는 코믹북이 있고, 반지의 제왕은 언어학자였던 JRR 톨킨이 세계관만 따로 책으로 낼 정도로 방대한 세계관을 가진 대서사시 책이 있으며, 해리포터는 작가 JK 롤링이 수십 권에 걸쳐 집필한 방대한 대서사시가 기반이다. 대서사시를 쓰기 위해서는 세계관이 철저하게 구성되어야 한다. 세계관이 철저하지 않으면 긴 서사를 쓸 수가 없다. 나도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 시나리오를 써본 적이 있는데 의외의 지점에서 막혀서 고생한 기억이 난다. 분명 나는 세계관을 철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게 촘촘하지 못한 탓에 사소한 지점에서 막혀버리는 것이다. 생리현상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주식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먹는지 등 세계관이 촘촘하게 설계되어있지 않으면 스토리를 쓰다가 계속 턱턱 막히게 된다. 마블은 스탠 리가 세계관을 담당하여 작가들이 그런 막힘이 있을 때마다 해결책을 제시했다. 원작이 없는 스타워즈는 조지 루카스라는 희대의 천재가 오리지널 스크립트를 써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 후속 편을 개발하며 세계관을 확장했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편수가 많아질수록 개연성 측면에서 욕이란 욕은 다 먹었고, 북미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나라에서도 흥행하지 못하는 세계관이 되었다. 세계관에 있어 원작이 중요한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는 왕좌의 게임이 아닐까 싶다. 책의 완결 편이 나오기 전에 영상화를 시켜 시리즈를 제작한 왕좌의 게임은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재빠르게 후속 시즌을 찍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됐고, 쉼 없이 매년 방영된 시리즈는 원작자 조지 RR 마틴의 집필 속도를 따라잡아버렸다. 마지막 시즌은 원작 없이 새롭게 만들어낸 이야기로 찍어야 했고, 모두가 알다시피 처절하게 실패했다. 미국판 국민신문고에 마지막 시즌 재촬영 청원이 올라와 기록적인 동의 수를 얻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뭐.


한국에서 개발하고 있는 세계관들 중에 대대적인 투자가 이루어진 것은 모두 웹툰 원작이다. 내가 각본 제안을 받은 작품들도 모두 웹툰이 원작이었다. 절대 웹툰을 무시해서가 아님을 미리 밝히고 얘기를 해보자면 웹툰 중에 반지의 제왕만큼 긴 서사를 가진 작품이 있나? 내 개인적인 집필 경험을 예로 든 것처럼, 쓰다 보면 설정에 구멍이 있음을 알게 되므로 새로운 세계관은 길게 쓸수록 탄탄해질 수밖에 없다. 계속 예기치 못한 곳에서 이야기가 막히기 때문에 그런 설정들을 보강하다 보면 세계관이 디테일한 부분까지 완성되는 것이다. 책이라면 적어도 한 권에 300페이지 분량을 쓸 테고, 그 300페이지를 완성하기 위해 600페이지를 쓸 것이다. 600페이지를 쓸 동안 세계관을 얼마나 탄탄하게 보강할지 생각해 보면, 애초에 한 권이 아니라 다섯 권 분량의 책이라면 얼마나 탄탄한 세계관이 완성될지 생각해 보면, 기획서 몇 장이나 웹툰 스크립트로 탄탄한 세계관을 만드는 게 가능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하나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소비자들이 만족하는 컨텐츠를 계속 만들어내는 것은 분명 매력적인 아이디어지만,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나? 웹툰을 기반으로 영화, 시리즈를 동시 개발하여 진행되는 세계관의 첫 작품이 곧 개봉할 예정이라고 한다. 내 걱정이 기우이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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