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쯤 하고 싶었던 말
영화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안 된다. 사회적 약자를 흥미 위주의 소재로만 활용한다던지, 남의 트라우마를 건드릴 수 있는 적나라한 표현이 나온다던지, 사회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메시지를 담고 있다던지, 잔인성과 폭력성이 도를 넘는 등 영화가 응당 지켜야 할 도덕선을 넘는 경우가 있다. 장애인인 주인공이 연애하는 내용을 만들어 장애인에 대한 섹슈얼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영화나, 여성을 성적 노리개 역할로만 쓴다거나, 필요 이상으로 잔인한 표현으로 청소년들에게 폭력성을 유발하는 영화는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아이들에게 과한 감정 연기를 시키거나, 노인에게 과한 액션을 요구하거나, 극한 상황에서의 촬영을 강요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법을 어긴 전력이 있는 감독, 배우, 스태프가 만든 영화도 죄를 용인해 주는 효과가 있고 모방범죄를 유발할 수 있으니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영화는 사회적 약자를 배려해야 하고 현실세계에서 강자들이 맡는 역할을 주어야 하며, 여성의 육체는 관능적으로 담겨선 안 되고 필요에 의한 노출은 최대한 성적이지 않게 찍어야 하고, 불손한 메시지를 담거나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영화는 제작이 되어선 안 되며, 법을 어긴 전력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영화 스태프에 참여하면 안 된다.
[오아시스]는 장애인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윤리적 기준으로 나쁜 영화다. [쉰들러 리스트]는 여성 유대인을 성적 노리개로 등장시키고 불필요한 노출을 보여주므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영화다. [기생충]은 사회적 약자인 서민과 빈곤층을 사기꾼에 살인자로 그려 윤리적 정당성을 상실했다. [바스타즈]는 잔인성과 폭력성이 필요 이상으로 과하여 청소년들의 폭력을 유발할 수 있으니 관람을 삼가야 한다.
첫 문장을 읽었을 때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문장이 거듭될수록 당연하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윤리적으로 완벽한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며, 그럴 필요도 없다. 관객과 많은 평론가들이 영화 윤리를 지적하는 경우가 많다. 검색을 해보면 알겠지만 어떤 영화라도 윤리적 문제는 제기된다. PC주의와 마찬가지로 그 기준이 '나'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불쾌하면 영화가 잘못한 것이다. 그게 표현이든, 메시지든. 내가 보기엔 [쉰들러 리스트]의 여성 노출이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겐 불필요한 노출일 수 있다. 타란티노의 영화는 거의 모든 영화에 폭력성이 과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무엇에 비해 과한 건지, 폭력과 잔인성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 밝히지는 않는다. 그 기준은 본인만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영화의 메시지로 가면 더 애매모호해진다. [군함도]는 강제징용 당한 한국인을 가장 괴롭혔던 건 일본인이 아니라 같은 한국인이라는 메시지를 내포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면죄부를 제공한다고 비판받았다. 그런 비판을 한 사람의 논리는 영화의 메시지가 그렇게 읽혔다면 만든 사람이 잘못했다는 것이다. 예술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기준 중 하나는 다양한 해석을 유발하는 것이다. 다양한 해석을 유발했다고 비판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용인된다. 한 작품이 전혀 반대의 해석을 낳아서 두 진영 간의 진영 싸움이 벌어진 적이 있는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아버지의 깃발]이다. 진보 진영에서는 파쇼 영화라고 비판받고, 보수 진영에서는 진보 프로파간다 영화라고 비판받았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깃발]의 메시지는 뭘로 봐야 할까. 만든 사람이 잘못했다는 논리라면 감독이 어떤 메시지를 담았는지가 명확해야 할지인데, 이렇게 정 반대로 해석될 수 있다면 헷갈리게 만든 사람의 잘못이라고 하려나? 남성 감독 영화에서 중요한 여성 캐릭터가 나올 때 정 반대의 비판이 나오는 경우는 흔하다. 감독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비판과, 여성 캐릭터를 비중 있게 다뤘다는 칭찬이 공존한다.
영화가 윤리적으로 완벽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영화는 예술이지 선동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법과 제도요, 예술이 아니다. 아무리 위대한 예술작품이라도 세상을 바꾼 적은 없다. 영화가 아무리 뛰어난 들 빨간불에 길을 건너게 만들 수 없다. 국회가 입법하면 빨간불에 길을 건너게 만들 수 있다. 우린 근현대사에서 입법자들이 잘못한 것을 예술에 덤터기 씌우는 일을 많이 봐왔다. 학교 폭력을 유발한다고 만화책을 불태워 만화 산업을 없애버리고, 비행 청소년을 양산한다고 염색한 연예인을 방송출연을 금지시키고, 과도한 게임이 학업 능력을 저하시키고 폭력성을 유발한다고 청소년의 게임에 대한 접근을 막았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학교 폭력의 주원인은 가정교육이므로 촉법소년의 폭력은 부모에게 책임을 묻게 하는 법을 만든다던지, 저녁시간은 무조건 부모가 아이와 함께 밥을 먹는 것을 강제하는 법을 만들어야 세상은 바뀔 것이다. 폭력을 내재한 만화, 게임, 영화를 못 만들게 한다고 세상에서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입법부가 헛발을 차거나 나태해서 일어난 문제를 가지고 예술을 탓하는 건 기만이자 사기이다. 층간소음 때문에 살인이 일어나고 인류가 멸망한다는 영화를 천 편을 만든다고 층간소음이 해결되지 않는다. 건축법을 바꾸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사람들은 왜 법이 해야 할 일을 예술에게 전가하는가. 예술은 예술로서 향유하면 된다.
같은 예술인들 사이에서도 분분한 의견이지만 나의 생각은 확고하다. PC주의가 강해질수록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더 어려워져서 가급적 논쟁을 피한다. 그래서 광장에서 소리라도 지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