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쓰고 있다는 시나리오를 드디어 끝냈다. 탈고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참 이상한 말이다. 그리고 시나리오에는 완성이란 것은 없고 타협만 있으니 완성이라고 쓰기도 뭐하다. 초고가 끝났다는 표현이 가장 알맞은 것 같다. 계속 고치다가 촬영하기 직전의 시나리오가 완성일까? 그럴 리가 없다. 촬영을 하다가도 바뀌는게 시나리오다. 시나리오는 영화 촬영이 끝나면 더이상 고칠 가치를 잃고 영원히 미완의 상태로 남는다.
참 도전적인 프로젝트였다. 실존인물에 관하여 실화를 기반으로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도전. 왜 그런 도전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 인물에 대해 써야할 사명같은 게 느껴졌다. 내가 하고 싶은 말과 그의 삶이 맞닿아 있는 느낌. 영화계가 활황이라 나에게 일이 많았다면 아마도 시나리오로 쓸 생각을 안 했을 주제였다. 기존의 충무로 장르 공식에 전혀 맞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에 아예 생각조차 나지 않았을 텐데, 기존의 공식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라 아이러니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한국 영화판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정말 살아남으려면, 정말 바꿀 마음이 있다면 기존 공식대로 쓰여진 영화를 찾을게 아니라 새로운 영화를 찾아야 한다. 나는 현재 영화판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나리오도 선택을 받지 못할 확률이 선택받을 확률보다 훨씬 높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썼다. 쓰고싶어서. 정말 쓰고 싶어서 예산이든 투자 가능성이든 신경쓰지 않고 시나리오를 쓴 건 7년 만인 것 같다.
다 쓰고 나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역시나 허무하다. 시나리오를 탈고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다. 엔딩을 쓰기 전까지는 맨날 생각할 거리가 있는 생활을 한다. 어디서 뭘 하든 머릿속 한 켠에는 시나리오 생각을 한다. 갑자기 씬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대사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생각할 거리가 없어지면 다른 지역으로 전학가는 중학생 같은 마음이 된다. 뭔가 머릿속 한켠에 끝내지 못한 생각의 실타래가, 가슴 한 켠에 풀어내지 못한 응어리가 남아있어야 하는데 없다. 시원함 보다는 허탈함이 크다.
물론 이 감정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을 테니까.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묵혀두고 다른 시나리오를 쓰게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끝냈다는 것을 자축하자. 초고는 쓰레기니까 긍정적인 피드백도 기대하지 말자. 누군가는 이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것에 공감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