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와 우울증의 상관관계

by Renaissance

시나리오를 쓰면 필연적으로 불면이 찾아온다.

불면이 찾아오면 우울이 뒤따라온다.

참 환장할 노릇이다.


시나리오를 늦게, 아주 천천히 쓰니까 이번엔 괜찮은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2분의 1 지점을 넘자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불면이 찾아왔다. 영화 스크립트를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반 지점부터 절정까지가 가장 힘들다. 퍼센티지로 따지면 50에서 75% 지점인 것 같다. 절정을 넘으면 굉장히 쉬워진다. 엔딩을 바꾸거나 시놉단계에서 엔딩을 생각해놓지 않은 경우라면 모를까 절정을 넘어서면 술술 풀린다. 3막 구조의 시나리오는 2막이 가장 길고, 가장 어렵다. 2막에서도 중간점부터가 지옥이다. 이미 반을 썼는데도 이 영화가 재밌을지 의구심이 들고, 절정을 가기 위한 빌드업 부분이기 때문에 한 씬도 섣불리 쓸 수가 없다. 이 부분이 재미없으면 영화는 망한다. 영화 엔딩이 이상하던데? 영화가 이상하게 끝나던데? 중반까지 재밌다가 영화가 산으로 가던데? 이런 평이 나오는 영화들은 다 이 지점에서 실패한거다. 이 부분에서 절정까지의 빌드업을 제대로 못 만들었기 때문에 엔딩을 납득하지 못하는 거다. 각색을 하게되면 보통 중간점부터 엔딩까지 전부 새로 쓰게 된다. 설정을 조금만 바꾸더라도 마치 아이스링크를 날아가는 컬링볼처럼 종국에는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기 때문에 중간점부터는 새로 쓰게 된다. 그래서 제작자가 '간단한 각색'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세상에 간단한 각색은 없습니다. 간단했으면 애초에 저에게 의뢰를 하시지 않으셨겠죠.' 혹여나 이 글을 보는 제작자분이 있다면 그런 단어는 쓰지 마시기 바란다. 각색비를 많이 줄 수 없다면 그냥 솔직하게 이 정도만 줄 수 있다고 말하면 된다. 간단이라니. 정말 간단하다고 생각하면 직접 쓰시라.


여러 시나리오를 썼지만 정말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는 이 지점이 재밌는 작품들이다. 피드백을 받을때 개연성을 물고 늘어지면 억울한 시나리오도 이 지점이 잘 쓰여진 작품들이다. 이 지점이 탄탄하지 못한 시나리오는 실제로 피드백을 받고 많이 고쳤다. 완전히 바꾼 시나리오도 있다. 자기가 쓴 시나리오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첫 장편 쓸때만큼 힘들었지만 결국 해냈다. 그 시나리오도 결국 못 팔았지만 혹시 모르지. 오징어 게임처럼 쓴 지 10년만에 빛을 발할지도.


이 지점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려고 누웠는데도 생각이 멈추질 않아서 불면이 온다. 필연적인 것 같다. 지금까지 서두르지 않던 시나리오를 서둘러 쓰고 있다. 절정 부분을 쓸 때까지 나는 우울과 자학적인 생각으로 고생할 것이다. '어차피 팔리지도 않을 시나리오를 왜 열심히 쓰고 있냐' '영화계 다 망했는데 영화 시나리오에 힘을 쏟는게 맞는거냐' '너가 뭐라고 대가들이나 쓸법한 작품을 쓰려고 하냐' 나는 부정적인 사람이지만 이런 생각을 언제나 이겨내고 시나리오를 완성시킨다. 지금까지 실패한 적은 없다. 이번에도 나는 결국 시나리오를 끝낼 것이다. 그 과정이 힘들어서 넋두리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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