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항에서 출항한 배는 바닷길을 따라 한시간여를 달려 소매물도에 도착했다. 항구 근처에는 작은 매점이 하나 있었고 식당들이 여럿 자리잡고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 좌판을 핀 할머니들은 소라와 해삼 같은 해산물들을 팔고 계셨다. 얼른 등대섬을 보고 이곳에 돌아와 맛있는 음식들을 먹어보고 싶었다. 우리는 안내 표지판을 따라 등대섬을 향해 걸었다. 바다를 보면서 섬을 둘러 가는 코스가 있었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돌아가는 배편에 맞춰 일정을 짜야했기에 우리는 좀 더 가파르지만 빠른 코스를 택했다.
본격적으로 등산로에 진입하기 전, 어느 카페에 잠깐 들러 레몬에이드를 하나 샀다. 카페 사장님은 싱그러운 레몬을 하나 꺼내어 즙을 짜냈다. 방금 짠 레몬즙을 시원한 탄산수에 섞은 뒤 우리에게 건네 주셨다. 단맛이 하나도 없는, 얼굴이 찌뿌려질 정도로 시큼한 레몬 에이드였다. 텀블러에 담아 둔 레몬에이드는 산을 오르는 내내 시원했다. 이마에서 땀이 흘러 내리고 숨이 차오를 때, 이 시큼하고 차가운 레몬에이드가 정신을 번쩍이게 만들어 주었다.
오르막 길을 따라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면 푸른 바다와 섬들이 내려다 보였다. 점점 멀어지는 바다를 뒤로하고 나무들이 우거진 등산로에 진입했다. 숨이 차오를 때는 잠시 쉬어가면서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쉼터에 다다랐을 때 나무들 사이로 진한 수평선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르른 하늘 아래로 보이는 짙푸른 바다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드디어 등대섬을 만나게 되었다. 바다 위 떠있는 조그만 섬 왼편에는 커다란 돌기둥이 여럿 솟아 있었다. 섬 위의 좁고 기다란 길 끝에는 하얀 등대가 서있었고 그 아래로 붉은 지붕들이 보였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섬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이 느껴졌다.
등대섬은 1986년 크라운 제과의 쿠크다스 TV 광고에 나오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섬 어디에선가 '쿠크다스 섬'이라 적힌 빛바랜 광고판을 보았다. 우리는 인터넷으로 통영을 알아보다가 우연히 소매물도를 알게 되어 이곳에 다다르게 되었다. 모르다가 알게 되는 것은 순간이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많구나, 나이가 점점 들어가며 많은 것들을 알게 되는데 아무리 경험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세상은 넓다는 말이 절실히 이해되는 요즘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등대섬은 너무 아름다워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한참동안 등대섬을 바라보며 두 눈에 그 모습을 담고, 카메라를 꺼내어 사진으로도 담았다.
계속 오르는 듯 하다가 전망대를 지나서는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무 데크가 깔린 계단의 난간을 잡고 조심조심 내려갔다. 내려간다는 것은 되돌아 올 때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니 속으로 약간 아찔했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새파란 바다가 맑고 깨끗해 보여서 뛰어 들면 아프지 않고 포근할 것만 같았다. 물론 정말 뛰어내린다면 곧장 죽겠지만 말이다.
끝이 바다에 닿을 것만 같은 내리막 계단을 만났다. 반짝거리는 바다를 마주보며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기분이 너무 좋았다. 바다 위를 살랑살랑 걷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가파른 계단이 나타났다. 그 끝에 다다르니 자갈들이 가득한 해변이 나타났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작은 섬, 언덕 위에 하얀 등대 하나가 솟아 있었다. 썰물 때가 되면 자갈 길이 드러나 걸어서 등대섬으로 건너갈 수 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아직 물이 덜 빠진 상태여서 자갈길 위로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사람들은 물이 빠지길 기다리는지 등대섬쪽으로 건너가질 않고 웅성거리며 서있었다. 우리는 돌아가는 배 시간 때문에 바닷물이 빠질 때가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얼른 항구로 돌아가야 맛난 해산물을 먹으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배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양말을 벗어 던지고 양 손에 운동화 한짝씩 쥐어들고 바다를 건너갔다. 차가운 바닷물이 발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다. 자갈돌이 둥그렇고 미끄러워서 건널 때 조심해야했다.
등대섬 쪽으로 건너와서는 물에 젖지 않은 자갈돌 위에 앉아 발을 말렸다. 바닷물이라 소금기 때문에 찐득거릴 줄 알았는데 차가운 계곡 물에 발을 담궜다 뺀 것처럼 개운했다. 등대섬까지 오르려니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는데 돌아갈 때는 물이 다 빠져서 자갈길이 훤히 드러났다.
등대섬을 뒤로하고 열심히 왔던 길을 되돌아 갔다. 항구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고 배를 탈 생각으로 서둘렀다. 가파른 계단과 오르막 길들을 지날 때는 어찌나 힘들던지 땀이 줄줄 흘러 내렸다. 그래도 이미 지나왔던 길이라 그런지 올 때 보다는 더 빠르게 갈 수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릴 때 즈음에 항구에 도착했다. 항구 근처 식당들을 기웃거리며 메뉴들을 살펴 보았는데 구미가 당기는 음식들이 없었다.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우리는 좌판을 핀 할머니 한 분께 다가가 해산물 모듬 하나를 주문했다. 할머니는 재빠르게 소라와 멍게를 손질해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아 주셨다. 초장과 소주는 근처 매점에 가서 사들고 왔다. 우리는 얇은 장판 위에 놓인 테이블 근처에 자리 잡고 앉았다. 소라를 새콤달콤한 초장에 푹 찍어 담근 뒤 입 안에 넣었다. 비린내 없는 시원한 바다향이 입 속에 퍼졌다. 소라의 오독오독 씹히는 식감이 끝내줬다. 회를 먹는 와중에 즉석에서 끓인 라면과 햇반도 사들고 와서 같이 먹었다.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은 근사한 식사였다.
오후 4시 30분, 통영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라 탔다. 둥그런 해가 이제 수평선과 가까워졌다. 잔잔한 바다는 노을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배 위에서 하루를 되돌아보니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여러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소매물도에서 보낸 시간들이 참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섬에서 경험한 아름다운 추억들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또 다른 섬들을 찾아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