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긴 줄 알았는데 (6)

연휴가 긴 줄 알았는데..

by 요마

길고 긴 줄 알았던 연휴가 끝났다.

연휴가 길었던 만큼 그동안 끝내리라 하고 야무지게 계획한 것들은 '역시나' 다 끝내지 못했다.

위안이 되는 것은 그간 미뤄오던 프로크리에이트 수채화 연습을 한 것이다.

디지털 드로잉에 많이 사용하는 어플인 프로크리에이트에는 다양한 기능이 잔뜩 있는데, 내가 사용하는 것은 몇 개정도로 제한적이다. 나는 색연필 느낌의 붓을 많이 사용했는데 수채화는 의외로 생각대로 컬러링이 나오지 않아서 시간 나면 수채화 컬러링 방법을 배워서 연습을 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안 쓰던 기능들을 찾아 배워서 적용하는데 재미가 붙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상에 붙어 연휴를 보냈는데, 오늘 문득 내가 언제부터 그림을 배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보니, "처음"이라는 단어와 연결 지으려면 좀 오래된 과거로 돌아가야 하는 일들이 많다. 가장 오래전, 그림을 배운 기억은 초등 저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한다.

나와 같은 반 친구의 어머님이 운영하는 미술학원이었는데, 그 당시 학교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고, 학원 크기도 꽤 컸었던, 잘 나가던 아동 미술학원이었다.

내 기억에 태극기도 그리고 (태극기의 빨간색과 파란색 위치를 헛갈려하던 시기라 너무 기억이 선명하다),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서 이것저것 만들기도 한 기억이 있다. 그 당시엔 학원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생각나는 것은 바로바로 그렸다. 인형놀이에 필요한 인형 옷, 인형 집, 크리스마스 카드 등등 나 혼자 마구 만들고 그렸던 시기였다. 놀거리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던 시기였고, 지금처럼 하루 종일 나오는 티브이와 스마트폰, 컴퓨터가 주변에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인 듯하다.


그리고 내가 6학년이 되었을 때, 나와 2살 차이 나는 언니가 미술을 배우러 다니게 되어 나도 자연스럽게 언니가 다니는 곳을 따라다니게 되었는데, 그곳은 학원이 아니고 화실이라는 이름이었다. 그 화실은 북적북적한 시골 재래시장통에 위치해 있었고, 속옷, 양말 등 잡화를 파는 건물 2층에 위치해 있었다. 열몇 평 정도의 아담한 크기의 화실로 학생들이 많진 않았는데 대부분은 미술을 전공하려는 중고등학생 언니들이었다 (내가 제일 어렸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데쌩, 수채화를 본격적으로 접했고, 즐겁고 재미있었던 기억밖에 없다.

선생님은 미술을 전공할 언니들보다 어린 나는 조금 느슨하게 알려주셨던 것 같다. 꽤 젋었던 선생님과 언니들은 어려운 사제관계보다는 언니동생 비슷한 친구관계처럼 그림을 그리며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오갔고, 주말엔 다 함께 야외로 그림을 그리러 나갔었다. 그러다 선생님의 건강상의 이유로 화실이 문을 닫게 되어 아쉬운 이별을 해야만 했다.

그 당시, 선생님은 가끔 내게 언니들보다 잘 그린다고 칭찬을 해주셨는데, 그건 진짜 잘 그렸다는 칭찬이라기보다는 미술을 전공할 언니들 틈에서 어린데도 열심히 그리기도 했고, 어렸기 때문에 정형화된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그렸던 자유로움에 대한 격려?이었던 듯싶다.


얽매이는 것이 없다는 것은 지금 나의 나이에 아쉽고 잡고 싶은 단어이다. 본격적으로 디지털 드로잉을 하기 전에는 취미로 아크릴 물감과, 파스텔오일 등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그림 그릴 시간을 만들기도 힘들거니와, 이렇게 하면 색이 이상하고 이건 모양이 이상하고 생각대로 그려지지 않으면 수정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선 듯 시작이 어려웠었다. 어릴 적 그림 그리기는 쉽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는데, 이젠 그리기 전부터 무엇을 그릴지, 어떻게 그릴지, 그리다 잘못되면 어쩌지라는 걱정거리와 이런저런 내 주변의 환경이 부담이 되어 그림 그리기는 내게 힘들고 어려운 취미가 되었갔다.

뭐든 제약이 많으면 재미는 없어진다.

요즘은 아이패드 덕분에 복잡한 준비와 정리과정도 없고, 그리다 쉽게 지우고 고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마음 편히 그리고 있다. 어쨌든 그리고 나면 하나를 끝냈다는 성취감이 낮은 완성도가 부르는 부끄러움을 넘어선다.


암튼, 지금은 핑계 좋게 쉬면서 취미 생활이 주가 된 듯 하지만, 본업이 있는 만큼 주기적으로 본업걱정을 하게 된다. 먹고살려면 해야 하는, 지금 나를 얽매고 있는 것들-발달재활 임상과 그에 관한 연구, 강의.

내 동료들과 지인들은 계속 연구결과를 퍼블리쉬하고 있는데 나만 뒤처지는 느낌에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물론, 임상과 강의도 나름 기쁘고 보람도 있지만, 가끔 내가 예술분야를 전공했다면 어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중고등학교 때 미술부활동을 했었고, 재미있게 하던 분야인데 그 당시엔 미술은 "취미"로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부모님께 많이 들어서 전공하겠다는 생각은 하질 않았다.

헌데,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요즘같이 거의 매일 그림을 그리다 보면 미술을 전공했더라면...이라는 생각에 미친다. 전공을 해서 내가 그림 그리기를 업으로 삼았다면 지금 내가 끄적이며 느끼는 순수한 기쁨은 여전할까? 직업이라면 따라오는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그런 기쁨을 대신하게 되겠지? 아니면 정말 좋아하는 일이기에 직업으로 하는 일조차도 재미있을까? 내가 10년만 젊었다면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기를 진지하게 고려했을까? 등등...

생각하면 아쉽기도 하고, 답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림은 내가 살아가면서 평생 할 수 있는 취미라는 것은 확실하다. 긴 연휴가 끝난 것이 아쉽고, 생각이 많아지는 주말 밤이다.


KakaoTalk_20251010_222629645.png 글도 팍팍 써지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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