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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수 Jul 12. 2022

태생적 한계

도급하다

씨제이(CJ)대한통운은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 소속 노조원들이 본사를 점거했음에도 왜 끝까지 직접 대화하려 하지 않았을까? 불문율처럼 여겨온 그간의 민법과 노동법상 판례들을 어길 수 없었기 때문일 터다. 그 판례들은 이렇다. 원·하청 관계에서 하청노동자가 원청업체를 대상으로 어떤 요구도 할 수 없다. 그건 오로지 계약 당사자인 하청업체와 노동자 사이에만 허용된다.


일을 주는 기업(원청)과 일을 받는 기업(하청)으로 나누는 외주화는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없어선 안 될 기본적인 기업의 경영기법이 됐고, 안전업무에까지 깊숙이 침투한 상태에 있다. 외주화의 종류인 도급, 위탁, 용역을 이제 막을 방법이 없어 보인다.


도급, 위탁, 용역은 계약의 형식에 따른 용어적 차이일 뿐, 법률적(민법)으로는 도급과 다 같은 의미다. 다들 명분상으로는 전문성을 위해 용역, 도급, 위탁의 형식으로 계약을 한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총수나 대표가 노동법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사실 외주화는 원청이 질 책임을 하청이 돈 받고 대신 지는 구조적 특성을 보인다. 용역비는 앞으로의 책임질 일에 대한 대가인 셈이다. 결국 민법과 노동법상 판례에 따라, 하청노동자에게서 비롯되는 문제는 하청업체의 책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법률상, 또는 계약상으로는 원·하청의 업무분장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하청노동자들은 원청이 자신의 문제에 암묵적으로 개입한다는 사실을 의심한다. 이때 원청이 내세우는 경쟁입찰제는 이 심증의 중요한 알레고리다. '최저'입찰제나 다름없는 이 제도는 원청의 의중이 하청에 반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다. 원청이 하청에 도급비를 얼마나 내려주느냐에 따라 일터의 환경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청노조가 굳이 사법적 처벌까지 감수하며 원청에 찾아가는 건 이러한 맥락의 연장이다.


작년 6월,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는 씨제이대한통운이 택배노조의 단체교섭 대상이라고 인정했다. 지금껏 하청노동자들이 했던 '합리적 의심'을 중노위가 인정한 것이다. 그것은 택배노조의 교섭요구에 씨제이대한통운이 대리점주들을 내세우며 제3자라는 주장을 꺼내기 힘들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존의 전통에 역행하는 결정에 대해 씨제이대한통운은 행정소송을 선택하며 불복했다. 그마저도 실패하면 상급심에 계속 항소함으로써 바로잡으려 할 것이다. 현대차가 불법파견에 대응했던 방법처럼, '될 때까지'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씨제이대한통운이 본사를 점거한 택배노조와 대화를 할 경우, 스스로 교섭대상임을 인정하는 꼴로 비치기 때문에 철저히 외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의도적인 외면이었던 셈이다.


사회주의적 요소라는 의심을 받는 노동법은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만 존재한다. 애초의 탄생 배경 자체가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산업혁명 시기에는 자본가의 욕심에 따라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하루 종일 일을 시키고, 적게 주는 임금마저 체불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기계처럼 일하는 노동자들은 정말 살기 위해 저항해야 했다. 그 결과 자본주의가 멈추는 최악의 변수를 없애기 위한 최소한의 타협안으로 바로 '공장법'이 나온 것이다.


대한민국 노동법도 자본주의적 법이란 방증이 있다. 사용자의 의견이 노동자의 요구에 비해 형식적으론 불리하게 개진되는 듯하지만, 실제론 유리하게 적용된다는 점 때문이다. 예외조항을 삽입하고 모호한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말이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에서도 모호성은 발견된다. 요컨대, 원·하청 간의 '실질적'인 지배·운영·관리의 관계를 증명하면 하청업체에서 발생한 중대산업재해의 책임을 원청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에게 물을 수 있다는 부분이 그렇다. 어디까지가 실질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을까? 자의적인 해석을 요한다.


산재 사망사건의 대다수가 안전 분야의 외주화로 인해 발생한다는 건 과거의 사례들로 이미 증명된 통계적 진실이다. 그 외주화의 정점에 대기업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은 외관상 대기업 총수를 겨눈 유일무이한 노동법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명확한 증거가 없기에 무죄로 추정될 뿐이지, 노동법 범죄의 시발점은 대부분 기업 총수나 대표의 명령에서 비롯된다. 어느 계약관계든 돈을 주는 쪽에서 더 많은 권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 기업과 노동자의 관계 등에서 충분히 증명되는 바다. 그래서일까? 대기업과 도급계약을 한 업체에 소속된 노동자가 죽으면 대기업 총수나 대표가 무조건 처벌받는다는 경제단체의 '공포마케팅'은 현재의 외주화가 실질적인 지배관계에 놓여 있음을 실토하는 반증사례 같다.


하지만 확실한 건 현재 관행처럼 벌어지는 원·하청 간의 도급·위탁·용역 계약으론 실질적인 관계를 인정받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동안의 합리적 의심들이 확인된다면 하청노동자의 문제까지 원청이 모두 끌어안아야 하는 초유의 상황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청의 비용부담은 물론 경제위기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중노위가 씨제이대한통운을 택배노동자들의 교섭대상으로 인정했음에도, 고용노동부가 여전히 기존의 민법과 노동법상 판례를 유지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아는 한, 하청노동자 문제로 구속된 대기업 총수는 여태껏 없었다. 우리 사회는 총수 없는 대기업을 견디지 못한다. 단적으로 이재용 없는 삼성을 상상해보자. 경영능력보다 핏줄의 영향력이 더 우선인 재벌경영 체제에서 대체될 수 없는 총수의 부재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경제의 위기징후로 읽힌다. 이러한 신호들은 곧 관용적 수사와 판결의 정상참작사유가 될 것이다.


무엇보다 외주화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노동법은 '민법'에 밀린다. 소시민들의 공간에서도 예외는 없다. 이를테면 최근까지 아파트 외곽 청소원으로 일했던 큰아버지가 재계약 3일 전에 해고통보를 받고도 부당해고를 주장할 수 없었던 건 그 방식이 '해고'(근로기준법)가 아니라 '용역업체에 대한 계약해지'(민법)였기 때문이다. 도급이나 외주화가 뜻하는 바를 잘 모르는 그는 "그만두셔야 될 것 같다"는 용역반장의 말 한마디에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고 터놓았다.


"세상물정 모를 때나 어설프게 대들었지.  나이가 이제 70이여. 우리같이  쓰는 사람들한테는 (노동)법이 쓸모없다는 사실쯤은   나이잖아. 그냥 받아들이면 속편해.  해도 어차피 바뀌는  없는  똑같잖아. 그거 따질 시간에 다른  알아보는   낫지.  나이에 나를 써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노동'법'은 노동'자'에게만 적용될 텐데, 정작 그는 그 법에서 배제됐다. 순간, 그가 민법상 소유권자에 의해 양도되는 '물건'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스치듯 들었다. '동물보호법'과 같은 비인간을 특정한 법을 제외한 법 중에 민법이야말로 거의 유일하게 인간이 아닌 대상에 대한 권리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하청노동자라면 누구나 겪는 현실이라는 점이다. 노동법의 태생적 한계 탓일까? 노동법이 사용자보다 노동자를 배신하는 일이 지극히 더 당연한 결말처럼 귀결되고 있다.


 



* 이 글은 2022년 3월 3일, 『한겨레』에 실렸던 「왜 택배 노동자를 마주하지 않는가」를 일부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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