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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경심 May 30. 2021

5-6 상상력을 키우자

어린 시절 무척 좋아하던 만화 <빨강머리 앤>을 책으로 읽었다. 책을 읽는 내내 순수하고 명랑한 앤과 함께 즐거웠다. 앤의 특기라고 하면 단연 풍부한 상상력이다. 때로는 상상 속에 너무 빠져들어 실수도 연발하지만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캐릭터다.

 앤이 친구 다이애나의 집 손님방에서 묵기로 한 날, 두 소녀는 신바람이 나서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그 침대에는 다이애나의 무서운 할머니 조세핀 할머니가 누워 있었다. 이 일로 조세핀 할머니는 엄청나게 화나 났다. 이에 앤이 떨리는 마음으로 조세핀 할머니에게 사과하자 할머니가 말한다.

“그저 재미였다는 말은 변명이 될 수 없다. 내가 어릴 땐 여자애들이 재미있다고 아무런 행동이나 막 하지 않았다. 길고 고된 여행을 마치고 곤히 자는데 다 큰 여자애 둘이 몸 위로 뛰어드는 바람에 잠을 깨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너는 모르겠지.”

 “잘 모르겠지만 상상은 할 수 있어요. 굉장히 놀라고 화가 나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저희도 나름 이유가 있었어요. 할머니도 상상할 수 있으신가요? 할 수 있다면 저희 입장이 되어 보세요. 저희도 침대 위에 누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고, 할머니 때문에 놀라 기절할 뻔했어요. 얼마나 놀랐는데요. 게다가 손님방에서도 못 잤어요. 할머니는 손님방에서 주무시는 게 익숙하시겠죠. 하지만 할머니가 한 번도 그런 특권을 누린 적 없는 고아 여자애라면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해 보세요.”

 앤은 조세핀 할머니의 기분이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상상은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분이 어땠는지 할머니에게도 상상해 보라고 한다. 이 부분을 읽는데 예전 내가 만난 어느 할머니 환자분이 퍼뜩 떠올랐다. 파라핀(초욕) 치료를 하는 환자였는데 올 때마다 알려준 대로 하지 않고 본인 뜻대로 하다가 치료실을 온통 더럽히고 가셨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매번 옆에 앉아 다시 설명하고 알려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할머니 환자분이 말했다.

 “내가 아들만 둘이 있어.”

 뜬금없는 말씀에 나는 그저 “네.”라고만 답했다.

 그러자 할머니가 느릿한 말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내가 만약 자네 같은 딸이 있으면 참 싫겠다고 생각했어. 매일 옆에서 똑같은 잔소리를 하는 딸이 있으면 말이야.”

 아이고. 대놓고 내가 싫다는 할머니 말씀에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약간의 오기가 발동해서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만약 할머니한테 매일 같은 말을 하는데도 안 듣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엄마가 있으면 어떠실 거 같아요?

 나는 이렇게 말해 놓고 할머니가 노여워하시지 않을까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할머니는 콧잔등을 찡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싫겄지~”

 “하하하하하”

 할머니와 나는 그렇게 마주 보며 한바탕 웃었다.


 빨강머리 앤이 자신들의 입장을 한 번 상상해보라고 했을 때 조세핀 할머니는 이렇게 답한다.

 “내 상상력은 조금 녹슨 것 같구나. 상상 같은 걸 해 본 지가 너무 오래된 게지. 네 입장을 들으니 내 입장만큼이나 설득력이 있구나. 모든 일이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달라 보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싫겄지~”하던 할머니 환자분은 상상력이 풍부하셨던 것 같다. 내가 반대 입장을 말하니 바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며 답을 하신 것을 보면 말이다. 역지사지란 상대편의 처지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 보고 이해하라는 뜻이다. 그러려면 빨강머리 앤처럼 상상력이 풍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력이 풍부해지면 역지사지가 더 잘 되고 공감 능력 또한 상승하지 않을까? 요즘 뉴스를 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소식이 참 많다.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나는 점점 상상하는 걸 잊고 사는 듯하다. 빨강머리 앤과 할머니 환자분을 생각하며 내 머릿속 상상의 근육을 키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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