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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경심 Jun 03. 2021

5-8 나의 영원한 선생님, 최복현 선생님

우리들의 영원한 어린 왕자

 닥치고 써라!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면서도 정작 쓰지는 않고 입만 살아있던 나에게 비수가 되는 말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뒤통수를 호되게 때리는 느낌이었다. <닥치고 써라>는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발견한 책이다. 그 길로 바로 대여해 읽었다. 글쓰기 왕초보인 나에게 굉장히 많은 도움을 준 책이었다. 책날개를 보니 우리 동네 가까이 있는 백화점에서 저자가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강의를 신청했다. <닥치고 써라>의 저자이신 최복현 선생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매주 두 시간씩 글쓰기 수업을 듣는 것이 정말 행복했다.


 선생님은 시인으로 등단했고 수필가, 소설가, 번역가, 인문학자, 신화학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대단한 분께 글쓰기를 배웠던 건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어떤 시를 최복현 선생님이 해석해 주고 난 뒤 다시 읽었을 때의 그 감격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문학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그런 가르침을 받고 어쭙잖은 실력으로 ‘줄’이라는 시를 한 편 쓰기도 했다.

      


 줄

조이면 끊어질까 봐

놓으면 힘들까 봐

조였다, 풀었다. 풀었다, 조였다.

끝없이 반복하는 풀기 조이기.     


‘끝없이 반복하는 풀기 조이기’는 우리의 인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최복현 선생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절대 쓸 수 없던 시이다.

 그러나 행복했던 글쓰기 강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강의가 폐강되었기 때문이다. 무척이나 아쉬워하던 차에 최복현 선생님으로부터 ‘책사랑 사람사랑’ 독서모임에 참여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책사랑 사람사랑 독서 모임은 한 해에 한 작가의 작품을 한 달에 한 권씩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다. 2013년 셰익스피어로 시작해 2021년 현재 톨스토이 작품을 가지고 토론하고 있다. 아이를 낳고 책 읽기를 무척 좋아하게 되었지만 책을 읽고 고작 몇 편의 독후감을 끄적였던 내가 어떻게 토론까지 할 수가 있을까. 게다가 모르긴 몰라도 공부 꽤나 하신 분들이 모여하는 모임인 것 같은데 나 같은 사람이 그 모임에 들어가도 되는 건지 겁이 났다. 괜스레 내가 가서 폐나 끼치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이번 작가는 그전에 다룬 셰익스피어나 알베르 카뮈보다는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파울로 코엘료였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토론회에서 다룬 첫 작품은 너무나도 유명한 <연금술사>였다. 워낙 말 주변 없는 나는 고심 끝에 내가 말할 글을 프린트해 갔다. 마치 학생이 수업시간에 발표하는 것 마냥 그냥 글을 읽었다. 그런데도 얼마나 가슴이 쿵닥쿵닥 떨리던지 지금도 생생하다. 총무님은 아주 조심스럽게 토론회니까 글로 써서 읽기보다는 그냥 말로 하는 연습을 하면 좋겠다고 했다. 7년째 꾸준히 해온 덕에 각자 발표 시간에 1분도 채 못 채우고 끝내던 나는 이제 10분은 족히 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데이빗 호킨스는 <의식혁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에는 임상적인 근거가 있다. 끌개 패턴은 그 사람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어느 분야에서든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높은 에너지 장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내적 태도가 자연스럽게 바뀌기 시작한다. 이것은 자조그룹 사이에 잘 알려진 현상으로, “몸만이라도 회합에 참석하라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높은 에너지 패턴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만으로도 ‘마찰 현상’이 일어나고 그래서 소위 ‘삼투 작용’이 시작되는 것이다.      


 데이빗 호킨스의 말대로 사람 사이에도 삼투압 작용이 일어난다. 나는 독서토론회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내적 태도가 바뀌었고 커다란 성장을 경험했다.      


 어느 날 내가 선생님께 물었다.

 “선생님, 제가 전에 중고 서점에서 선생님이 번역하신 <캉디드> 책을 샀어요. 그런데 이렇게 중고서점에 나온 책들을 사면 선생님께는 금전적으로 전혀 도움이 안 되지 않나요?”

 책은 꼭 사서 봐야 한다고 교육받은 내가 정말 궁금해서 질문한 것이었다. 선생님은 답하셨다.

 “글쎄, 그렇게라도 내 글을 읽어주면 감사한 일이지.”

 강의 중에는 이런 말씀도 했었다.

 “제가 왜 시를 좋아하는 줄 아세요? 돈이 안 되니까요. 그러니 부담 없이 마음껏 쓸 수 있거든요.”

 선생님은 글쓰기를 밥벌이와 연결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했다. 본인은 글을 쓰는 일이 즐거운데 돈과 관련되어 쓰는 글의 양보다 돈과 관련 없는 자기 성찰을 위한 글, 뭔가 깨달았을 때 그 기쁨을 메모하는 일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복현 선생님을 알면 알수록 진정 문학을 사랑하는 분이시구나 하고 느꼈다.      


 내가 오늘날 이 정도의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최복현 선생님 덕이 굉장히 크다. 몇 년 전에는 선생님 그리고 두 명의 문우님들과 8개월간 진행된 소설 쓰기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비록 소설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프로젝트를 완주한 뒤에는 소설 작법의 모든 것, 문학의 모든 것을 배운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의 어떤 결핍을 끊임없는 자기 계발로 채우려 했던 나는 배움에 대한, 문학에 대한 갈급함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었다.      


  내 인생의 멘토이시자 최고의 스승님인 최복현 선생님은 안타깝게도 지난 1월에 작고하셨다. 가족이 아닌 분이 돌아가셨는데 이렇게 가슴이 아파보기는 처음이었다.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내가 얼마나 많이 선생님께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스승님을 넘어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선생님의 장례식장에 간 날은 독서모임 날이었다. 독서모임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비워 놓았는데 그날에 선생님 장례식장을 갈지 그 누가 알았을까. 사람은 한 치 앞도 모르는 존재라는 것,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선생님은 인간은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늘 강조하셨다. ‘너의 죽음을 알라’는 ‘메멘토 모리’와 ‘현재를 즐겨라’는 ‘카르페 디엠’을 강조하셨다. 그 가르침들은 과거 상처들에 묻혀 허우적대던 나에게 지금, 여기를 살게 해 주었다.


 당신의 죽음을 알고 그러셨을까. 1월의 읽은 책은 다름 아닌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었다. 선생님은 가시는 그 순간까지 큰 선물을 주고 가셨다.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 디엠’을 조화롭게. 이것이 선생님이 나에게 주신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이다.      


 중국의 철학자 천자잉은 철학을 공부하면서 철학의 대가들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고 했다. 마주 보며 듣는 가르침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진다고 말이다. 나는 늘 선생님과 마주 보며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진 가르침을 받아왔다. 너무나도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부족한 내가 받아도 되는 사랑일까 싶은 사랑을 주셨다. 황송했다. 이제는 그 큰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아가겠다.  

    

 감사했습니다. 너무나 황송했습니다.

최복현 선생님, 나의 영원한 선생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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