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탈(無頉)이라는 가장 큰 행운
요 며칠 몸이 정말 좋지 않았다. 저녁에는 체온이 39.5도까지 치솟았고, 지독한 몸살 기운에 옷자락이 피부에 스치기만 해도 아플 만큼 통증이 심했다. 몸이 무너지니 그 어떤 의지도, 계획도 무용지물이었다. 그저 숨을 몰아쉬며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어제 병원을 찾아 수액을 맞고서야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몸이 조금 나아지니 비로소 멈췄던 일상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밀어두었던 운동을 하고, 아들을 하원시켜 태권도장에 보내고, 영어 학원 숙제를 챙겨 보내는 지극히 평범한 일들. 정신없이 아이를 뒷바라지하는 와중에 헤드헌터에게 연락이 왔다. 얼마 전 면접을 본 담당자에게서 좋은 피드백이 왔으니 조금 더 기다려보자는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이직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이보다 반가운 소식이 어디 있을까.
불과 얼마 전까지의 나라면 이런 소식에 마음이 들뜨고 다음 단계를 치열하게 계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독한 열병을 앓고 난 뒤여서일까. 좋은 소식보다 더 깊게 다가온 것은 '무탈하고 평안한 하루 그 자체'였다.
문득 깨달음이 왔다. 어떤 대단한 이벤트가 있는 삶보다, 그냥 주어진 일상이 아무런 사고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 삶이라는 건 참 묘해서, 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만큼의 굴곡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높은 위치에 있으면 내려올 날을 걱정해야 하고, 찬란한 순간 뒤엔 반드시 그늘이 진다. 그러니 너무 좋은 일도, 너무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잔잔한 상태야말로 오늘 내가 마주한 가장 큰 행운이자 평안일지도 모른다.
한때는 삶에 변화가 없고 정체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에 지치고 괴로웠던 적이 있었다. 무언가 계속 일어나야 하고, 더 높이 올라가야만 인생이 잘 풀리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아프고 나면 다시 보인다. 지금 이대로, 변하지 않는 일상 속에서도 감사하고 누려야 할 것들이 이미 내 곁에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특별한 소식은 없어도 내 몸이 아프지 않고, 아이가 건강하게 학원에 가고,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별일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 이 지루할 만큼 평범한 무탈함을 유지하기 위해 삶은 얼마나 많은 행운을 우리에게 쏟아부어 주고 있는 것일까.
오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갔음에, 그리고 그 안에서 가족과 함께 숨 쉴 수 있음에 깊이 감사한다. 어떤 변화나 성취에 매달리기보다, 오늘처럼 잔잔한 일상이 내일도 모레도 이어지기를 바라며 이 평온한 하루를 소중히 간직한 채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