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계획이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휴대폰 메모장을 먼저 켰다.
그날 해야 할 일을 1번부터 10번까지 적어 내려갔다.
우선순위를 매기고, 예상 소요 시간을 계산했다.
체크 표시가 늘어날수록 마음이 조금씩 진정됐다.
주말이 되면 카페에 앉아 다음 주 계획을 세웠다.
월요일엔 브런치와 note 기사 작성, 화요일엔 부업 준비,
수요일엔 영어 공부 2시간, 목요일엔 운동, 금요일엔 네트워킹.
빈칸이 보이면 괜히 불안해서 무언가를 채워 넣었다.
유학을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목표 점수는 몇 점, 시험은 몇 월까지,
지원 대학은 상·중·하로 나누고
합격하지 못했을 경우의 플랜 B까지 정리했다.
취업 준비 때는 엑셀 파일을 만들어
지원 기업 수를 숫자로 관리했다.
하루에 최소 3곳 지원.
일주일에 1번은 면접을 볼 수 있도록 스케줄을 설정했다.
한 달 안에 30곳 이상 지원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계획은 나를 안심시켰다.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라는 증거 같았다.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성실한 사람이라는 확인 같았다.
하지만 계획이 틀어지는 날은 달랐다.
시험 점수가 기대에 못 미쳤을 때,
면접에서 탈락 메일을 받았을 때,
사람 관계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을 때.
나는 상황을 분석하기 전에
먼저 나를 의심했다.
“왜 더 준비하지 않았지?”
“이 정도도 예상 못 했나?”
“나는 역시 아직 부족한 사람인가?”
사실 세상은 늘 변수로 가득한데,
나는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성장을 위해 계획을 세운 게 아니라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계획대로 흘러가면 안심할 수 있고,
계획대로 성공하면 내 가치도 증명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계획은 방향을 알려주는 지도일 뿐,
인생을 고정하는 레일은 아니다.
길이 막히면 돌아가면 되고,
비가 오면 잠시 멈추면 된다.
지도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계획을 세운다.
다만 이제는 여백을 남겨둔다.
예상치 못한 하루를 위한 여백.
실수해도 괜찮다는 여백.
속도가 느려져도 스스로를 탓하지 않기 위한 여백.
혹시 나처럼
계획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이 말을 건네고 싶다.
당신이 불안한 건 게을러서가 아니라,
잘 해내고 싶기 때문이라고.
미래가 선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조금 돌아가도 괜찮다.
계획이 흔들려도, 당신의 방향까지 흔들리는 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치열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