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전 세계는 우크라이나 전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장의 한켠, 총성이 아닌 침묵 속에서 군인들을 위협하는 더 치명적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이러스였다.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한때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이 바이러스가 지금, 러시아 군대 내부에서 폭발적으로 확산 중이다. 카네기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 군 내 HIV 감염 사례는 2022년 전쟁 발발 이후 무려 20배 이상 증가했다. 이 전염병은 기관총도, 탱크도, 미사일도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전쟁이라는 혼돈, 그 속의 방치와 절망, 파괴된 위생 체계만으로 군인들을 침식시키고 있다.
전쟁이 불러온 보이지 않는 팬데믹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 군의 HIV 감염률은 2022년 말까지 13배, 2024년 말까지는 무려 20배 이상 폭증했다. 감염 경로는 다양하다.
야전 병원에서의 오염된 주사기
부상자 치료 과정에서의 비위생적 수혈
병영 내 보호받지 못한 성적 접촉
마약 사용 및 주사기 공유
전쟁은 단지 생명을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위생, 관계까지 무너뜨린다. 포화 속에서 기본적인 위생 개념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고,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가 됐다. 그 결과, 병사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HIV, 다시 부활하는 공포
HIV는 한때 20세기 후반의 ‘죽음의 병’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보건시스템과 교육, 치료의 발전으로 극복 가능한 만성질환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지금, 러시아는 1990년대의 그 암흑기로 되돌아가는 듯한 양상을 보인다. 보고서는 “러시아는 2022년 이후 세계 HIV 신규 감염 상위 5위 국가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모잠비크, 나이지리아, 인도에 이어 러시아가 그 뒤를 잇고 있는 현실. 특히 군대 내 감염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보건과 전투력, 인구구조, 사회안정에 직결되는 중대한 위기다.
왜 러시아 군대에서 HIV가 폭증했는가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시스템이다.
전장 한복판에서 의료체계는 붕괴되었다.
야전병원은 감염 관리가 거의 불가능했다.
피로 얼룩진 붕대와 주사기, 마약류 사용, 위생 개념의 부재
병사 간 성폭력, 인권침해, 성매매, 고립된 심리 상태
여기에 더해 크렘린의 정치적 결정과 군 내부의 조직적 방치가 이 참사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어떤 전쟁도 병사의 내부 붕괴를 감당하지 못한다. 총알은 외부의 적을 겨누지만, 바이러스는 내부에서 군을 갉아먹는다.
러시아의 침묵, 그 안에 숨은 공포
카네기폴리티카 보고서는 러시아 국방부 내부 자료를 인용해 이 감염이 조직적으로 은폐되고 있으며, ‘문제 제기 자체가 금기시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고 전한다.
정부는 이를 군기 문란이나 비애국 행위로 간주하며 공식 대응조차 꺼리고 있다.
하지만 이미 수치로 드러난 감염률은 국가적 침묵으로 덮을 수 없는 수준이다. 2024년 기준, 러시아 전체 신규 HIV 감염자의 3.9%가 군과 연계된 집단에서 발생했다. 이 수치는 전 세계 HIV 감염자의 20분의 1이 러시아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HIV 감염은 군사력 붕괴의 신호탄
감염병은 단순한 질병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군 조직 전체의 전투력 약화로 직결된다.
치료를 요하는 장기 복무 불가능 인력 증가
HIV 관련 보건 비용 증가
장기적 인구감소 및 병력 확보 문제
군 내부 동요 및 사기 저하
보고서는 “이 HIV 발병으로 인한 러시아의 인구통계학적, 경제적 손실은 수십 년 동안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얻은 이익보다 훨씬 더 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조국을 위한 희생’이라는 미명
러시아는 전쟁에서 죽어간 병사들의 관을 조용히 운반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은 총탄에 의해서만 오지 않는다.
총에 맞아 죽는 병사와
병원에서 치료받다 감염으로 사망하는 병사,
국가는 그들에게 동일한 명예를 부여할까?
총알은 적의 공격이지만, HIV는 방치와 무책임의 결과다.
이 ‘침묵의 감염’은 러시아 군이 얼마나 병사 개개인의 삶과 건강을 도외시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준다.
이 전염병은 러시아만의 문제인가
러시아의 군 내 HIV 감염 사례는 우리에게도 시사점을 던진다.
군 조직 내 감염병 대응체계는 충분한가
군인의 성 건강, 약물 사용 실태는 관리되고 있는가
비상 상황에서 보건 시스템은 유지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러시아만의 것이 아니다. 군을 보유한 모든 국가, 특히 징병제나 장기 복무 중심 군 체계를 갖춘 국가는 이 구조적 리스크에 언제든 노출될 수 있다.
전쟁은 바이러스에게도 기회다
러시아는 전쟁을 벌였지만, 바이러스는 그 틈을 노렸다. 무너진 의료 시스템, 무시된 인권, 파괴된 병영 문화, 외면당한 병사들의 신체와 정신. 그 결과, ‘죽지 않으면 감염되는’ 군대가 만들어지고 말았다.
전쟁은 바이러스에게도 기회였고, 침묵은 감염을 키웠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는다.
병사란 단지 전투를 위한 도구인가?
감염도 명예로운 전사로 기록되는가?
러시아는 이 20배 증가한 HIV 감염의 대가를 무엇으로 치를 것인가?
그 해답은 아직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이것이다.
지금 러시아 군에서 벌어지는 이 일은, 어느 날 우리 군에서도 충분히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