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가기 싫어.”
이 한마디는 한국 사회에서 오래된 진실이자, 여전히 반복되는 청년들의 고백이다. 하지만 이제 그 말의 무게는 조금 달라졌다. 단순히 ‘귀찮아서’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으니까’ 피하는 시대가 되었다. 병역의 의무를 회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국적 포기’다.
최근 5년간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한 병역대상자는 1만8천 명을 넘어섰다. 해마다 4천 명 이상이 한국 국적을 버리고 외국 시민권을 선택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대부분 미국, 캐나다, 일본, 호주, 뉴질랜드와 같은 선진국이다. 이 중 60% 이상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 숫자만 봐도 병역의무가 단순한 개인 선택이 아니라, 계층의 문제임을 드러낸다. 부모의 재력, 정보력, 인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결정이다.
‘국적상실’과 ‘국적이탈’. 이름은 달라도 의미는 같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제는 한국인이기를 그만두겠다는 뜻이다. 국적상실은 스스로 외국 시민권을 얻어 한국 국적을 버리는 경우이고, 국적이탈은 태어날 때부터 복수국적을 가진 이가 성인이 되어 대한민국 국적을 포기하는 것이다. 둘 다 결과는 같다. 병무청의 데이터에서 빠지고, 병역의무에서도 사라진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한 해 입대하는 병역대상자가 20만 명 안팎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병역자원 10명 중 1명은 국적을 버려 의무에서 벗어나는 셈이다.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공동체의 균열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병역의무를 회피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간극은 곧 공정의 문제로 이어진다. 의무는 평등해야 의미가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세상에는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는 이들이 스스로 군복을 입는다.
외국 영주권자나 이민자 자녀 중 일부는 자발적으로 대한민국의 군문을 두드린다. 지난 5년간 총 2,800여 명이 ‘자원입영’을 신청했다. 미국, 중국, 베트남, 일본, 캐나다,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국적은 다르지만 마음은 같았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내 책임을 다하겠다.”
가장 주목받은 사례는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의 장남, 이지호 씨다. 그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해군 학사장교로 입대했다. 법적으로는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군복을 입었다. 그것은 한 개인의 결단을 넘어, 한 세대가 잃어버린 가치를 상기시키는 상징이었다. ‘가진 자는 빠져나가고, 남은 자는 견디는’ 세태 속에서 그의 선택은 오히려 이례적이었다.
병역은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의 공정성을 가늠하는 시험대다.
어떤 이는 부모의 재력으로 국적을 바꾸고, 어떤 이는 스스로 시민권을 버리고 국방의 의무를 택한다. 같은 시대를 살지만, 서로 다른 언덕 위에 선 이 두 부류의 청년들은 한국 사회의 불균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병역은 단순히 총을 드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한 사회가 청년에게 요구하는 ‘책임의 형태’다. 그러나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할 의무가 누구에게만 집중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차별’이 된다. 국적을 포기하고 떠난 이들이 자유를 얻었을지 모르지만, 그 자유는 공동체와의 연결을 끊은 대가 위에 세워진 것이다.
반대로 군복을 입은 이들은 불편함을 택했다.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는 ‘나의 이름으로 이 땅을 지킨다’는 자부심이 있다. 국적을 버린 이들이 외국에서 누리는 자유는, 누군가의 헌신 위에 존재한다.
이제 국가는 질문해야 한다.
왜 어떤 청년은 책임을 회피하고, 또 어떤 청년은 스스로 감당하려 하는가.
왜 병역의무는 ‘특권층의 선택’과 ‘서민의 숙명’으로 갈라지는가.
황희 의원의 말처럼, 병역 자원의 충원율을 높이는 정책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국적 포기라는 ‘합법적 회피’를 막을 기준이다. 동시에, 자발적으로 복무를 선택한 이들에게 합당한 존중과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병역이 의무가 아닌 명예의 선택으로 남을 수 있다.
국적을 버린 이들이 떠난 자리는 수치로 남지만, 군복을 입은 이들의 결단은 이야기로 남는다.
의무를 피한 자유는 가볍고, 책임을 택한 자유는 깊다.
결국 국가를 지탱하는 것은 제도나 숫자가 아니라, “나는 대한민국의 청년이다”라는 마음 한 조각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