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에서

by 나자영

오전에 건강검진을 마치고

오후에 별다른 일정이 없어서 광화문 근처에 있는 기독교 서점 '생명의 말씀사'에 갔어.

한번 가야지 한지도 1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갈 기회가 없었어.

사실 기회가 없었다는 건 다 핑계고, 시간을 안 낸 거지.

시간을 안 냈다는 건 마음을 안 내줬다는 뜻이고.


서점에서 마가복음 필사책을 샀어.

원래 필사를 계속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래도 마가복음까지는 하려고 마음을 먹었어.

이번에는 마음을 내준 거지.


서점을 잠시 둘러본 후에 그냥 집으로 가기 아쉬워서,

근처에 있는 경희궁에 갔어.


나는 서울에서 덕수궁 다음으로 경희궁을 제일 좋아해.

여기는 늘 한적해서 도심을 벗어난 느낌이 들거든.


더운 날씨지만 궁은 나무들이 많아서 비교적 선선해.

밴치에 앉아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면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왜, 그런 날 있잖아, 불어오는 바람에 울컥 눈물이 나는 날.

나한테는 오늘이 그런 날이었어.

왜 인지는, 나도 모르겠어.


그냥, 많이 지쳐있는 것 같아.


건물 하나 안 보이고, 나무만 보이는 풍경 앞에 앉아 있는 게 그렇게 좋더라.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일상에 치이고 삶에 지쳐있다는 거겠지.


그런데 있잖아, 이런 날들도 또 지나갈 거야.

그리고 어디서 생기는지 모를 힘이 솟아나는 날이 또 올 거야.

그때까지 이렇게 바람의 숨결을 느끼면 돼. 그러면 괜찮을 거야.


눈 깜짝할 새 가을 단풍이 물들고 입김 서리는 겨울이 올 거야.

그리고 너는 더 단단해져 있을 거야.

그때까지 잘 지내보자, 우리.


시간이 멈춘듯한 궁에서,

어느 더운 여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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