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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온 Sep 07. 2023

부부상담소

너무 늦기 전에

모든 사건들이 그런 지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엔 법원에서 4회에 걸친 부부상담을 제공해 줬었다.


법원에서 제공해 주는 상담은 본격적인 이혼절차가 진행되기 전 마지막으로 재고해 보시라는 일종의 권유다. 물론 이혼에 대한 결심을 굳힌 상황일지라도 조금 더 원만한 감정해소의 계기가 될 수 있으니 어떤 상황에서도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막상 실제로 상담을 받아본 입장에서는 4회가 참 짧게 느껴졌다. 이혼까지 갈 만큼 해묵은 감정들을 서로 풀어내는데 네 번으로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싶지만 비용을 대는 법원 입장에서는 당연히 무제한으로 제공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부부상담을 받아본 입장에서는 효과가 있을라치면 단 한 번의 상담으로도 많은 것이 바뀐다. 정서적인 도움들도 많지만 그 이상으로 지적인 부분, 말하자면 부부간의 예의라던지 명확한 어떤 기준, 역할 분담, 육아지식 등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혹인 누군가 정해주지 않으면 산으로 가버릴 만한 부분들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알려주기도 한다.


다른 이들에게 권할만한 정도인가. 당연한 얘길. 비단 위기에 빠진 가정들 뿐만 아니라 잘 지내고 있는 모든 가정들도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는 의무적으로 받았으면 좋겠다. 농담이 아니라 부부상담이 세상을 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정도다.


소송이 시작되기 전 사적으로 받았던 부부상담 첫회에서 나는 결혼한 이후 아내가 그렇게 우는 걸 처음 봤었다. 내용은 그렇게 기억나지 않는다. 대단한 내용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런 것 같다. 그 대단하지도 않은 내용들로 아내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한없이 울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사실 나도 울고 싶었는데 괜히 따라 우는 것 같아서 울진 않았다. 나도 아내에게 하지 못하고 나 혼자 삭여야 했던 말들을 하나씩 꺼내는데 내가 말할 때마다 득달같이 달려들며 꼬투리 잡으려는 아내를 제지해 주는 상담사님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아내가 알아주지 않고 일주일에 서너 번은 찾아오던 장모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댔던 통에 내가 결혼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뭐가 맞는지조차 혼란스러웠는데 상담사님은 끝없이 터져 나오던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시면서 하나하나 반응해 주셨다.


그래. 어쩌면 누구나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줄 사람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긍정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결혼생활동안 쌓여있던 답답함이나 서운했던 감정들이 홀가분해졌다.


그 후 몇 번의 상담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다시 전처럼 대화할 수 있게 됐고 행여 아내가 내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호흡이 가빠진다던지 귀가 빨개지는 증상이 없어졌다.


상담 회차가 어느 정도 마무리될 무렵 상담사님은 아내에게 부모님과 정서적으로 분리돼야 한다는 말을 했었는데 당시 아내는 자기 부모님은 딸이 자기 하나라 아끼시는 마음에 어쩔 수 없으셨던 거라며 대답을 회피했었다. 사실 그때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알았다 한들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내겐 더 이상 혼자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하는 삶이 아니기 때문에 그동안의 방어기제들을 점검하고 불필요한 부분들을 앞으로의 삶에 맞게 바꿔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이 역시 무슨 말인지 당시로서는 알지 못했다. 지금에야 어렴풋이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만 할 뿐.


법원에서 제공해 준 상담에서 아내는 개인상담만 2회 진행한 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 들었다.


상담사님은 내게 더 이상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지만 나는 상담을 계속 받고 싶었다.


당시 내 감정들은 순간 해소한다 해도 지속적으로 생겨났고 내겐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실마리가 부족했다.


상담사님께는 정 안되면 육아교육이라도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드렸고 남은 회차들을 계속 진행했다.


정말 값진 시간들이었다. 면접교섭을 하며 딸과 온전히 같이 지내는 시간 동안 내 부족한 모습이나 무지는 매번 드러났고 이를 틈틈이 메모해 매 상담 회차마다 가지고 가 조언을 구했다.


처음에는 다소 건조한 태도로 나를 대하셨던 상담사님은 내 질문에 항상 성심성의껏 답해주셨고 상담시간을 종종 넘겨도 내게 늘 필요한 얘기를 해주시면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어느덧 상담 회차가 끝날 무렵 상담사님은 조금은 사적인 얘기들을 해주셨다.


사실 처음 서류상으로 나에 대해 읽어보셨을 때 전형적으로 가부장적인 남편을 떠올리셨다고 했다. 말도 없고 무뚝뚝하고 살가운 말 한마디 없는 무관심한 사람.


직접 만나본 나는 말이 많다는 사실에 놀라셨고 농담도 잘하며 무엇보다 친절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딸을 사랑하고 가정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다. 방법이 서툴렀을지라도 누구라도 알 수 있었을 모습이니 너무 자책하지 말라며.


스스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될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원치 않는다면 그걸로 결혼생활은 끝이다. 아내분이 원치 않는 이상 관계가 계속될 수는 없다고. 만약 지금 딸을 대하는 정도로 아내분을 대했다면 문제 될 일이 없었겠지만 시행착오가 있으셨을 거고 그 과정에서 아내분은 상처를 받아왔을 거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아내분은 그걸 극복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


마지막으로 상담사님은 내게 한번쯤은 생각해 보라며 아내가 나에 대해 했던 말을 해주셨다. 지금에 와서 너무 미운 사람이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와 결혼했을 거라고. 그 말은 지금도 아프다.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부디 행복하길 바란다며 내게 딸에게 줄 선물을 조금 챙겨주셨다.


내게 종종 혼인생활에 대한 고민을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실소를 터뜨리며 어디 물어볼 사람이 없어 나한테 물어보냐고 핀잔을 주지만 누군가 나 같은 아픔을 겪는 건 또 싫기에 어지간하면 성심성의껏 듣고 답해준다.


정말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같은 점을 중심으로 테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어떤 정당화로 포장하거나 상대방을 깎아내리던 비슷한 곳에서 시작되고 비슷한 길을 걸어간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천태만상이겠지만.


난 부부상담소를 늘 권하는데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시큰둥하게 대답은 할지라도 정말 가겠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갔다 왔다는 사람도 본 적 없었다.


이가 꼭 다 썩고 나서야 치과에 가는 거랑 같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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