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온 Sep 07. 2023

엄마

시작의 가치

이혼 소송이 시작되고 충격을 받아 며칠을 쓰러져있던 내게 무심하게 밥을 먹으라고 말한 후 내가 들은 체도 하지 않자 밥이 식는다고 짜증을 낸다. 억지로 식탁에 앉아 세 숟가락쯤 들다 이내 내려놓으니 네가 남긴 밥을 누가 먹을 거냐고 다 먹으라고 한다. 정말 입맛이 없어 가만히 한숨을 내쉬는 내게 이윽고 한다는 말이 화룡점정이었다.


"내가 봐도 너 평소에 하는 걸 보면 걔 마음이 이해가 간다."


이게 우리 엄마다.


내가 어릴 적 어머니는 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종종 '너 같은 자식을 네가 낳아봐야'라는 말을 하곤 했다. 지금 내겐 나를 딱 절반 정도 닮은 아이가 있고 순간순간의 표정이나 몸짓에서 내 모습을 볼 때면 가슴 한 편이 서늘할 때도 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오히려 나와 닮았기에, 내가 아주 잘 아는 방식으로 무언가를 원하고 떼를 쓰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해할 수 있고 감사하게도 본인이 원하는 걸 명확하게 말해주는 편이라 내게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빠르게 넓혀준다.


딸을 키우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육체적으로 힘들어서는 아니다. 물론 나도 쉬고 싶을 때는 있지만 딸은 내가 아프다고 말하면 그 어린것이 내게 쉬라고 말해준다. 내가 스스로 한심하다 싶을 만큼 침대에 누워 끙끙거리고 있는 주말 아침에도 조용히 책을 보거나 키즈영상을 보면서 내가 일어나길 기다린다. 내가 제일 한심하다.


한 번은 아이와 거실에서 놀다가 내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온 바닥과 벽이 파랗게 칠해져 있었다. 아이의 손에는 내가 아끼던 수채화 펜이 들려있었고 마침 자기 팔을 파랗게 칠하던 중이었다. 내가 종로까지 가서 사 왔던 펜이었고 제법 비쌌다. 뭐 이런저런 이유들이 섞여 순간 화가 났었는데 나는 아이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목소리를 높이고 왜 그랬냐며 야단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왜 그랬긴. 물에 막 퍼지는 게 신기해 보이니까 마침 아빠 잠들었을 때 만져봤겠지.


나는 내 부모님이 정말 미웠다. 세대가 그런 세대였다지만 내가 어릴 적 무슨 잘못이라도 하면 아버지는 귓방망이를 날렸고 어머니는 회초리를 들고 여기저기 후드리거나 아버지에게 체벌을 넘겼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체벌했었는데 '그 정도로 하지 않으면 나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나중에 들었을 때 기가 막혔다.


만약 내가 어릴 때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아직도 내 기억 저편에 어둡게 박혀있다. 그때 당시 차곡히 쌓여있던 기억들은 지금도 나를 엄격한 사람으로 만든다. 타인의 실수에 민감해진다.


나는 아이가 칠한 바닥과 벽을 말없이 닦고 있었다. 입술은 꽉 물려있었다. 아이에게 아빠 물건은 아빠 꺼라고 강하게 얘기한 후 시무룩해진 아이를 남겨둔 채 묵묵히 닦아갔다. 아이는 울며 내게 안기려고 했지만 팔을 씻고 안아줄 거라고 아이를 멈춰 세웠다. 다행히 수채화 펜이라 물에 금방 녹았다. 천만다행이었달까.


아이를 화장실로 데려가 팔을 씻겼다. 잘 씻겼다. 아이가 내게 '아빠 나 이제 깨끗해졌어.'라고 말했을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고작 쥐어짜는 목소리로 '그러네'라고 대답한 게 전부였다.


그때 내 귀에는 어릴 적 부모님이 나를 혼내던 고성들이 맴돌고 있었고 같이 소리 지르고 싶어 하는 나와 싸우고 있었다.


잠들기 전 침대에 딸과 둘이 누워있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서로 별 말이 없었다. 나는 딸에게 조용히 물었다.


"딸은 아빠가 무서워?"

"아니"


"그러면 아빠랑 같이 안고 자도 돼?"

"응"


나는 딸을 조용히 안았고 아이는 내 품에 안겨 이내 잠이 들었다. 그 어린것이 속으로 얼마나 마음 쓰고 있었을까.


잠든 딸을 옆자리에 조용히 누이고 난 후 나는 화장실에 가서 혼자 울었다. 자기혐오였다. 그날의 딸은 이혼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법원에서 면접교섭으로 주말 동안 와있던 상태였고 내겐 7개월 만에 보는 딸이었다.


그 7개월 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밤을 딸이 보고 싶어 울었던가.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사라지기 얼마 전 아빠랑 놀러 가고 싶다고 울던 딸을 어린이집에 밀어 넣었던 나를 얼마나 저주했던가. 양육권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서류들을 쓰고 울었던가. 결국 소송기간 동안 임시 양육자 대신 한 달에 두 번 주말 동안 1박 2일로 면접교섭이 주어졌을 때 거품을 물며 항소하려는 나를 주변사람들과 변호사까지 말려야 했다. 그래, 그러면 그동안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자, 그렇게 몇 개월 동안 내가 받았던 양육교육과 천천히 쌓아가던 아동심리학 저서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애가 색칠하고 논 게 뭐라고 그거 하나 어쩌지 못해 그렇게 한심한 모습을 보였나. 스스로에 대한 엄청난 실망감과 혐오감이 치밀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그때까지 쌓여있던, 참아왔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에 차라리 여기서 다 끝내고 싶었다.


그래. 목매고 죽어도 딸은 집에 보내주고 생각 좀 해보자. 그렇게 그 밤을 혼자 소리 없이 흐느끼며 보냈다. 그때 처음으로 내 안 깊숙이 있던 어둠을 발견했다.


그날 내가 느꼈던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혐오는 고스란히 어머니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무덤에 침을 뱉을 수는 없으니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할 수는 없었고 남아있던 어머니의 모든 행동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평생 내 의사를 물은 적이 없다. 하다못해 점심 반찬 한번 내게 뭘로 먹고 싶냐고 물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내 의사 없이 차려진 밥상은 한 숟가락도 먹지 않았다. 그러면 어떡할 거냐 물으면 버리라고 했다. 나랑 상관없는 밥상이니까. 우리 집에 와서 갑자기 청소를 하는 어머니를 쫓아냈다. 그렇게 청소가 하고 싶으면 내 집이니까 물어보고 하시라고. 누가 청소를 물어보고 하느냐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머니는 쫓겨났다.


가장 심했을 때가 딸이 와있는 동안이었다. 아이가 계란이 먹기 싫다고 하는데 '먹어야 착한 어린이지'라고 대답하며 계란을 아이 입에 밀어 넣으려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어머니는 또 쫓겨났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어머니는 결국 나와 딸에게 '너네들 꼬락서니가 불쌍해서 와줬더니'라는 말을 뱉었고 그 길로 어머니는 한 달 동안 우리를 볼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딸이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할 때만 잠깐 찾아가서 얼굴만 보고 왔을 뿐 조금이라도 내가 어릴 때 겪었던 양육방식이 보일라치면 나는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아이가 없을 때도 어머니는 종종 이런저런 이유를 가지고 집에 찾아오곤 했었는데 특별히 이유가 없다면 어머니를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나도 사람이다. 나도 도덕과 예절이 뭔지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바꾸고 싶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하나로 몇 개월 동안 나와 어머니를 구분 지었다.


그땐 네가 말을 안 들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너 잘 되라고 했던 거지. 나도 그때 얼마나 고생해서 너를 키웠는데. 그렇게 해줬는데 네가 이렇게밖에 안 될 줄 알았으면. 너도 양심이라는 게 있으면. 너 같은 거 뭐 내가 좋아서 계속 챙기는 줄 아냐. 그 나이 처먹고 제 구실도 못하니까 내가.


정말 가끔은 엄마고 나발이고 물리치료를 해주고 싶었다. 당신들이 그 어리고 약했던 내게 했던 그대로. 결국 내 입으로 하나하나 다 뱉었다.


엄마, 지금 내가 맘먹고 한대만 려도 엄마 죽어. 성질 돋우지 마. 어릴 때 생각나면 죽은 아빠까지 싸잡아서 밤새도록 때리고 싶어. 당신들은 나한테 그랬잖아. 누가 평생 참은 거 같아. 내가 하고 싶다는 거 곱게 해 준 적 한 번이라도 있어. 결국 내 공부 끝낼 수 있게 해 준 건 큰누나야. 내 결혼 입에도 담지 마. 당신이 정신 못 차리고 딴짓하면서 돈 쓰고 다닐 때 내가 번 돈으로 내가 한 결혼이야. 개뿔도 도와준 거 없으면서 사람 약해졌다 싶으니까 또 슬슬 기어 와서 장난치고 있어. 당신이 엄마라는 자각이 있고 어떤 할머니로 남을지 결심이 서면 그때 다시 오세요. 나한테 너도 부모 돼보라고 빈정거렸었지. 나도 이제 부모로서 얘기할게. 똑바로 살 생각 없으면 얼굴도 비추지 마 이제. 이건 내가 이제 부모가 돼보고 하는 얘기야. 당신이 내 말 듣고 얼마나 기분 나쁘건 내 알바 아니니까 정신 좀 들면 왜 내 입에서 이렇게까지 모진 말이 나오는지 며칠이 들더라도 고민 좀 해보세요.


사이가 완전히 틀어질 수도 있다는 것도 각오했다. 자식이 가질 수 있는 윤리나 도덕 같은 건 옛 저녁에 버렸다. 아내마저 떠난 마당에 몇 안 되는 가족이었지만 그 때문에 비겁할 순 없었다. 내가 바꾸지 않으면 내 딸이 겪게 된다. 내가 참으면 딸도 참아야 한다. 대를 걸친 어둠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언젠간 나도 그 당시의 내가 조금 모질었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 시간이 지나면 그때 조금 더 부드러운 방식이 있었음을 알 때도 오겠지. 하지만 바꿀 수 있는 건 항상 그때뿐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바꿔야 할 일들이 있다. 내 안에 있는 어둠을 먼저 들여다보지 않으면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나아가더라도 결국은 잘못된 방향일 테니.


몇 개월에 걸쳐 해묵은 상처들이 계속 드러났고 새로운 상처를 남기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은 어머니를 쫓아내 놓고 혼자 몸살이 나 며칠을 드러누워있기도 했으며 사람들이 훤히 다니는 바깥에서도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른 적도 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는 이제 내게 의사를 먼저 묻는 것이 습관이 돼있었지만 그날이 조금 피곤했었던 모양이다. 볼일 보러 잠깐 우리 집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화장실 청소를 하셨는데 물을 전기코드에 쏘는 바람에 집안의 전기가 모두 나가버렸다.


어머니는 내가 또 화를 낼까 봐 물청소를 했다는 말을 못 하셨고 나는 원인을 찾지 못해 몇 시간 만에야 겨우 물을 닦아내고 전기를 다시 올렸다. 화는 나지 않았다.


엄마. 피곤하면 집에 가서 쉬세요. 피곤해 보여요. 애는 다음 주에 또 오니까 보고 싶으면 다음 주말에 또 보면 돼요. 무리해서 있다 보면 엄마도 모르는 사이에 또 이상한 행동들을 해요. 쉬는 게 맞아요. 애를 생각하면 그게 맞아요.


어머니는 말이 없으셨다. 나는 기다렸다. 이내 어머니는 사실 일주일 내내 쉬지 않고 일을 하느라 많이 피곤하다고 하셨다. 쉬시고 내일 애가 가기 전에 잠깐 들를 테니까 집에 가 계시라고 했다.


그 후로는 나도 어머니에게 특별히 화를 내 본 적이 없다. 어머니도 내가 화낼만한 일을 하시지 않는다. 물론 서로 견해가 안 맞는 일들은 종종 생기지만 많이 나아졌다.


여전히 진행형이다.


부모는 아이의 시작이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 자신이 보고 판단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긴다. 그 시작을 부모로 삼는다.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받아들여지는지, 어떤 반응이 돌아오는지, 어떤 결과를 내는지 등 부모로부터 배운다. 그 후 세상으로 나간다.


세상으로 나간 아이는 완전히 새롭게 배우는 것도 있겠지만 별 문제가 없는 경우 부모를 통해 배운 것들을 그대로 가져간다. 시간이 흘러 조금씩 형태가 바뀌지만 많은 부분에서 가장 밑바닥에 부모로부터 시작된 것들이 남아있다. 그걸 부모로부터 배웠다는 사실을 어느샌가 잊은 채 살아간다.


만약 자신에게 고질적으로 생기는 문제가 있다면 한번 그 근원을 찾아 거슬러가 보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만나게 되면 높은 확률로 거기엔 가족이 있다. 가족의 시작은 부모로부터, 그 부모의 부모로부터 시작된다. 원치 않는 부분이 있다면 거기서부터 과감히 바꿔나갈 수 있다.


부모는 불완전하다. 그러기에 더 나아질 수 있다. 나의 부모님이 내게 상처를 안겨줬던 그 당시 그들의 나이는 지금의 나와 동년배다. 지금의 내가 불완전하듯 그들 역시 마찬지였다. 용서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과거에 벌어진 일은 어떤 식으로든 물릴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지금의 나를 바꿀 수 있다면 미래는 바뀐다. 진정 내가 부모를 위해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내 아이에게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줄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미래는 현재의 거울일 뿐이다. 내가 지금 당장 작은 것 하나만 바꿔도 미래는 나아진다.


내가 좋은 남편이지 못했던 이유를 정말 오랫동안 부모님 탓으로 돌렸었다. 내 현실의 비참함을 어머니의 탓으로 돌리고 나면 비겁한 후련함이 생겨 잠깐은 편안했으나 어느샌가 내 모든 불행이 어머니의 탓으로 여겨지기 시작하자 내 삶은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이제 노인이다. 이제 와서 본인이 그게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고 내게 말해준다 한들 당신에겐 이 모든 상황을 바꿔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어머니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그저 떼를 쓰고 있었다. 정작 현실을 조금씩 바꿔갈 수 있는 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록 그 사람에게 좋은 남편이진 못했지만 그건 그 시절의 나. 아이에게 나는 평생 동안 아빠. 비록 유년시절이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런 과거들조차 그리 불행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만약 현재의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하다면 과거를 원망해 보라. 정말 짓이기고 찢겨 이제는 아무 맛도 나지 않을 때까지 실컷 원망해 보라. 오롯이 나만 남는 그 순간까지 하나씩 깨어나가다 보면 정말 나만 남는다. 그 자신마저 파헤치고 나면 그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미리 말하지만 끝이 아니다. 다시 시작할 뿐. 몇 번이라도.

이전 11화 담배가 필요한 사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