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꽤나 사교적인 편인데 처음 보는 사람과도 자연스레 농담을 주고받고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도 필요에 따라 가장 중심이 되는 역할을 자처하는 데에 주저함도 없다. 사람들이랑 같이 있으면 소위 기가 빨린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에겐 별로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다.
여기까지만 얘기하면 전형적인 외향성의 성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저 외향성 역시 가지고 있을 뿐 꼭 남들 앞에서 떠들어야 직성이 풀리고 억지로 주목을 받으며 광합성을 하는 성격은 아니다.
어지간하면 혼자 있는 걸 좋아하며 내향성의 사람들과도 긴 시간 동안 조용히 대화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 상대가 더 이상 대화를 원치 않는 사인을 보내면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마무리하는 방법도 나이를 먹으며 몸에 익어가는 듯하다.
오랜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으며 새로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에게도 특별히 선을 긋지 않고 대한다. 하지만 그런 내게도 새로이 친구를 만든다는 건 어려운 일이 돼버렸다.
이혼을 겪게 되면서 그동안의 인간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아무래도 충격적인 일을 겪다 보니 소위 옥석을 가리게 된다고도 말하고 걸러진다고 표현하기도 하는 과정을 어떤 식으로든 겪게 되는 듯하다. 퇴보는 아니지만 그동안 오랫동안 굳어왔던 어떤 것들이 뜯어져 나가는 기분이라 고통이 따랐고 그 후에는 확실히 홀가분한 무언가가 따라왔다.
우선 무례한 사람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남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애초에 관심도 없고 그저 본인이 쿨하게 보이는 것에만 맞춰진 사람들을 내가 그동안은 어떻게 같이 지냈을까 싶을 정도로 무례했는데 피부 위에 뿌려진 소금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멀쩡한 피부 위에 소금을 붓는다 한들 아무 일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전신화상을 입은 사람의 몸 위로 소금을 비벼댄다면 끔찍하겠지.
그동안의 내 피부는 참 두꺼웠던 것 같다. 아니면 화상을 정말 대차게 입었던지. 둘 다인가. 이혼은커녕 결혼 근처도 안 가본 사람들이 나를 앞에 두고 요즘은 이혼해도 괜찮네 어쩌네, 이제 자유롭게 살겠다느니, 듣고 있으면 와 하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다.
연락이 뜸해지거나 아예 끊기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이혼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뭔가 어려워졌을 수도 있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간단한 안부인사도 조심스러워졌을 수도 있고. 어떤 친구는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을 굉장히 부정적인 경로로 겪으며 트라우마가 있었는데 내 이혼소식을 듣고는 황급히 전화를 끊은 후 그대로 연락이 끊겼다. 나와 그렇게 유쾌했던 사이였지만 연기처럼 사라졌다. 전화를 가끔 해봐도 받지 않는다.
예전에 같이 팀활동을 했던 형은 이혼 소송 전에도 종종 가족끼리 만나 같이 휴가철을 보내곤 했었는데 소송 후로는 연락이 뜸해졌다. 내 딴에는 괜히 화목한 집안에 연락하기도 민망해 선뜻 전화하기가 그런데 반년에 한번 정도는 형이 먼저 전화해 괜히 울먹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잘 지내냐는 안부를 묻곤 한다. 형 그 정도로 슬프게 지내진 않아요, 하고 말해도 자주 연락 못줘서 미안하다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통에 되려 웃음을 준다.
나이차가 있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뭔가 확실히 갈리는 것 같다. 꼭 그게 세대차이는 아니고 조금 나쁘게 얘기하면 이 사람이 나이를 어떤 식으로 먹어왔는지 알게 된다고 해야 할까. 내 의견을 들어주고 안 들어주고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마다 각자 가지고 있는 의견은 당연히 다를 수 있으니. 말하는 방식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
좋은 어른이구나, 내가 나이를 먹으면 최소 이 정도는 해야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도록 얘기해 주는 어른들이 있다. 꼭 어느 말이 좋게 들리고 이런 식으로 대화해야 한다는 매뉴얼이 있는 건 아니지만 톤이나 이야기를 듣고 응답을 해주는 속도가 참 편안해서 듣는 동안 마음이 편해진다.
반대로 와 내가 이렇게 나이 먹을까 봐 진짜 무섭다, 싶은 사람들도 있다. 가족들은 잘 지내고 있냐는 말에 지금 이혼소송 중이라고 조심히 얘기하면 처음에는 놀라다 갑자기 나한테 뭐 결혼 생활을 어떻게 했냐느니 여자들 마음은 원래 어쩌고 자기는 여태까지 어쩌고 그걸 다 참으면서 여기까지 왔어도 이혼 없이 어쩌고. 집안 어른이 갑자기 전화 와서 야 너 잘된다고 들었는데 돈 좀 빌려달라고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무슨 각오를 할 필요도 없이 벌어지고 정리된다. 그리고 사실 딱히 떠벌리고 다닐 일도 아닌 데다가 내 경우엔 소송 진행 속도가 워낙 느렸기에 오히려 사람들이 몇 달에 한 번씩 전화 와서 좀 어떻게 돼 가냐고 물어봤을 때도 해 줄 얘기가 없었던 경우가 많았다. 자연히 모두와 연락 자체가 조금 뜸해졌던 것 같다.
이혼을 결혼 전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그렇게 단순한 동물일까.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 다시 결혼 전의 생활로 돌아간다든지, 배우자만 없어졌을 뿐 기존의 생활을 이어간다든지. 그렇게 익숙한 무언가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내게 있어 결혼이 행복했던 건 하루를 같이 보낼 가족이 생겨서였고 이른 나이부터 집을 떠나 생활하며 외로웠던 내가 더 이상 밖을 돌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그리움 때문이었다. 당시 아내는 항상 나를 지지해 줬었고 나는 행복했었다.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어둡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겪었기에 그 이전의 생활이 더 어둡게 느껴졌었고 나에게 끊임없는 힘을 주던 집은 이제 공허함만 남아 나를 계속해서 갉아갔다.
내겐 어느 곳으로도 돌아갈 곳이 없다. 마음이 이렇다 보니 이전까지 만나던 사람들을 예전처럼 만날 수도 없어진 듯하다.
이전 같으면 쉽게 만나 대화할 수 있을 정도의 사람들과 길게 말을 섞지 않게 됐다. 스몰톡을 건네오는 상대가 불편해졌다. 가벼운 인사 정도면 충분할 텐데 내 옷을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는 사람들이, 내가 편하고 싶어 바꾼 가르마에 대해 피드백을 해주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면 사람 못 만나, 친구가 말하고, 그런 사람들 만나서 뭐 할 건데, 내가 답한다. 스몰톡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문화야. 분위기 풀자는 거지. 혼자 풀고 오라 그래, 아니면 말 걸어도 되는지 미리 물어보고 시작하던가. 너무 예민한 거 아냐? 내가 지금 남의 사정 봐줄 수 있는 처지는 아니잖아.
소송이 어느 정도 접어들었을 때부턴 일상생활은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견딜 수 없었다. 별거 아닌 상대방의 행동이 화가 나고 신경이 쓰여 밤을 꼬박 새기도 했고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애매한 태도를 보이거나 내가 실수를 했다 싶으면 걱정이 되어 아침 꼭두새벽부터 쿵쿵거리는 심장을 달래야 했다.
한동안은 사람을 만나는 일을 극단적으로 꺼렸는데 대인기피증이라고 말하기엔 단어가 주는 느낌이 너무 소극적인 것 같고 적극적으로 밖에 나가지 않기 시작했다. 딱히 누군가와 말을 섞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당시 심리상담사님의 말로는 누구나 일상에서의 사소한 마찰을 무의식 중에 참아가며 생활하고 있는데 그 능력이 고갈된 상태라고 했다.
남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고 무심코 주고받는 말들에 하나하나 곤두서는 느낌이었다고 해야 할까. 희한하게 술을 마시면 그 증상들이 가라앉았는데 주말에 가끔 술자리에 초대받을 때면 낯선 사람들이 있더라도 예전처럼 쾌활하게 시간을 보내며 누구도 내가 이혼소송 중인 사람이라는 걸 믿지 못할 만큼 밝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면 거무죽죽한 아침을 다시 맞이하며 하루종일 침대 밖으로 나가지도 않은 채 밤을 기다리곤 했다. 괴롭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했다. 고작 그게 당시의 내 최선이었다.
사람 일은 정말 모른다.
그렇게 폐쇄적인 생활을 이어갔는데도 새로운 사람들을 계속 알게 됐다. 오랜만에 연락이 된 옛 친구의 소개로 다른 친구를 알게 됐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도 이혼을 한채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는 상태였다든지, 이전부터 얼굴은 알았지만 따로 교류는 없던 동네 형이 사실 이혼을 겪은 사람이었다든지, 새로 알게 된 동갑의 거래처 사람과 친해지다 보니 이혼가정에서 자랐다는 걸 듣게 된다든지, 사람의 삶은 참 기묘하게 펼쳐진다.
한동안 나는 내가 이혼 중이라는 사실에 파묻혀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그런 때라 그랬는지 주변에 온통 이혼과 관련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가웠다. 나와 같은 아픔을 겪어본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동지애 비슷한 감정도 들고 한편으로는 이제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들은 이 사람들 밖에 없다는 체념 비슷한 걸 했던 것 같다.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상처를 만져준다.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었고 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게 되는 느낌도 있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어떤 식으로든 알게 된다. 그들은 내가 아니다. 이혼이라는 껍질을 쓰고 비슷한 정도의 통증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저마다 다른 이야기들이 있고 사실은 서로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차라리 상대가 아예 다르다는 걸 처음부터 알았다면 기대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상대에게 걸었던 기대는 실망으로, 가끔은 비난으로 바뀌어 도리어 상대를 상처 입힌다. 그 부정적인 에너지는 사실 자신이 상대 배우자에게 실망했던 부분이며 그 뿌리를 타고 올라가 보면 자신이 아주 옛날부터 품어왔던 마음의 병이다.
가장 비슷하고 가깝다고 느꼈던 이들에게 가장 기대하고 실망한다. 이혼을 겪은 사람들끼리는 스스로 어느 정도 감정정리가 될 때까지는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구나, 그 비슷한 교훈을 친구 대신 얻었었다.
돌아가는 기차는 없었다.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 생겨난 방어기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시야들로 새로운 사람들은 만난다.
내 친구들은 여전히 내 친구들이지만 한구석에서는 친구들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는, 말한다 해도 친구들이 이해하기 힘든 경험과 감정들을 겪어버렸다.
여전히 사람들을 좋아한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이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신혼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놀러 나와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 옛날 생각이 나 슬며시 도와주고 싶을 때도 종종 있다.
나는 이전보다 친절한 사람이 됐고 아이들이 곧잘 따르는 어른이 됐으며 동성이든 이성이든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편한 사람이 됐다. 나는 그저 웃으며 대하고 내가 피로를 느끼면 양해를 구한 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법도 알게 됐다.
외로워졌다.
내가 어떻게 예전보다 조금은 더 성숙한 사람이 됐는지 설명하고 싶지 않다. 내가 공들여 설명해 준다 한들 겪지 않은 이들을 이해시켜 줄 자신이 없다. 이해한다는 말에 몇 번을 착각했나.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다들 각자의 세상을 살아갈 뿐이라는 걸 알아버렸다.
솔직히 결혼도 해보지 않아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화로 얘기하는 것만으로 무언가가 풀린다면 얼마든지 들어주겠다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의 진심 어린 말이 너무나 서글펐다.
어쩌면 지금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아내일지도 모른다. 거울의 양면 같은 관계니까. 이혼한 부부가 종종 만나 친구처럼 지낼 때가 있다는 말이 조금은 이해된다. 애초에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 가장 가까이서 서로 실망했던 사람들일 테니.
그래. 가장 가까운 사람마저 보낸 마당에 친구에게 그 짐을 떠넘기려 하다니. 결국은 그냥 내 이야기일 뿐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