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멀어지는 걸 지켜보다
이런저런 상념이나 회상에 빠져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세상은 그저 조용하고 평온해서 마치 그런 일들이 정말로 있었는지, 그게 사실 중요했던 일인지도 멀게 느껴진다. 그리고 천천히, 하지만 내가 거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은 채 나를 움직여간다.
어른들은 내게 빨리 잊어버리는 게 좋다고 말한다. 무슨 말인지는 안다. 하지만 잊는 건 정말로 그게 나를 떠났을 때 뒤따라오는 결과일 뿐 잊는 것을 의도할 순 없다. 역설이다. 잊기 위해서 노력할수록 그 기억에 집중을 하게 될 텐데 당연히 잊는 것과는 멀어지지 않을까.
2년여의 군생활은 한때 나의 삶 그 자체였고 전역 후에도 한동안 내 생활습관들을 지배했었지만 더 이상 그때의 트라우마도, 자부심도 내게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따금씩 그때 기억이 날 때면 잠깐 추억에 젖었다 이내 다시 잊는다.
군생활을 시작할 때도 자유롭게 살던 습관들이 몸에 배어 적응하는 데에 지독한 고생을 했었지만 1년쯤 지났을 때 나는 전형적인 상병 중 하나가 되어 어리바리한 하급 병사들의 군기를 잡고 있었다. 당시 신병들의 눈엔 평생 군생활을 해온 무서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고작 1년이었는데.
군생활 이전부터 함께했던 여자친구는 내가 회사생활을 시작하고도 1년여를 더 만나다 헤어졌었다. 대학생에서 이등병, 병장으로, 다시 신참 사회인으로 오르내리는 날 보며 어떤 느낌이었을까. 아내보다도 오랫동안 연인으로 지낸 사람이었지만 헤어지고 나서는 결국 시간에 밀려갔다.
이따금씩 회사에서 하던 일들이 떠오른다. 도면을 그리고 서류를 수정하고 밤을 새워 만든 제안서류를 아침에 검토받자마자 차에 기어들어가 죽은 듯 잠들던 기억, 집에 가서는 잠자는 일 밖에 없으니 그마저 아깝다며 회사 앞 찜질방에서 편히 잠들던 생활습관,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며 일하고 승진하고 더 일하고, 서서히 지쳐가던 시기.
아내를 처음 만나던 날, 결혼하자고 말했던 그날 아침, 주먹구구식으로 시작했던 신혼생활, 그래도 행복했던 시간, 아이가 태어나던 날, 나만 보면 울어 서운했던 마음, 처음으로 혼자 아이를 돌보던 날, 아빠랑 있고 싶다고 어린이집 앞에서 대성통곡하던 아침, 억지로 아이를 달래 어린이집에 밀어 넣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며 우울했던 마음.
기억이 점점 지금과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아파온다.
못내 떠밀리듯 가는 걸음이라도 가능한 천천히 내키는 만큼만 걷자고 스스로 되뇐다.
이제 다시 돌릴 수 없는 시간들이 그리워 되돌아가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것보다 멀어지는 모습들을 이따금씩 돌아보다 느릿하게나마 내 힘으로 한 걸음씩 걸어갈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우아하지 않을까.
돌아보는 풍경들이 손에 잡힐 듯 훤해서 이제는 정말 지겨워지면 어느 새부터는 한참 동안 앞을 보며 걸어가겠지. 그러다 이따금씩 또 뒤돌아보면 더 이상 아무렇지 않아 지는 날도 오고 그게 뭐였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아 잊고 지내는 날들이 길어지겠지.
지금은 너무 가까워 손에 닿을 것만 같아 아프지만 그렇게 살아가야지. 또 살아가겠지.
내가 지금 너무 힘드니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무턱대고 달려가다 한참 헤매고 보니 다시 제자리이길 반복해 왔다. 세상은 그저 천천히 흘러가고 내 삶도 천천히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변하고 또 흘러갔다.
살다 보면 또 떠오르는 날도, 잊고 지내는 날도 있다는 걸 받아들이며 그저 살아가기 시작했다. 긍정적으로 볼 필요도 비관적으로 볼 필요도 없이 그냥 벌어지는 일들을 벌어지는 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언젠가는 정말 가벼운 걸음들을 걷고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