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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온 Aug 30. 2023

신경정신과

어떻게든 잠들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가운데 한 가지만 생각했다. 이대로 넋 놓고 끌려가듯 이혼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아내가 미웠다.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이건 아니다. 당신이 나한테 이럴 수는 없는 거였다. 나한테서 딸을 데려가선 안 되는 거였다. 마음대로 되게 하지는 않겠다. 그러려면 자야 한다. 먹어야 하고 어떻게든 정신 차려야 한다. 그런 강박 속에서 아는 지인이 추천해 준 신경정신과를 찾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신경정신과에 갈 때 어떤 마음으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나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들어가 접수를 마쳤다. 이윽고 담당 원장님의 진료가 시작되고 상담을 할 때쯤 나는 이제 울음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지쳐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보라는 원장님 뒤로 보이는 창 속에 하늘이 참 맑았다고 기억한다. 두서없이 시작해 이혼 소송을 거쳐 아내 이야기를 할 땐 주로 배신감과 관련된 감정이 들었다. 이윽고 딸 얘기를 시작하면 어디서 기운이 나는지 또 울음이 나왔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고 있다고 느꼈던지 원장님은 한숨을 쉬며 능숙하게 대화를 정리하셨고 그래도 어떻게든 돈은 벌어놓으라는 말씀과 함께 어떤 도움을 주면 되는지 물으셨다.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스트레스와 불안이 심하다는 대답에 항우울제와 항불안제가 처방으로 나왔다. 해당 약들의 기전을 여쭤보고 어떤 시기에 어떤 식으로 복용할지를 상의한 뒤 처방받은 약을 가지고 어머니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한번 밤이 찾아왔다. 어머니집은 한적한 곳에 있어 밤이 되면 불빛도 소리도 없었는데 그 적막 속에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하지만 비어버린 집에 돌아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우울증의 경험을 오랜 시간 가졌던 지인과 상의한 후 항우울제는 우선 미루기로 하고 항불안제를 먼저 복용했다. 가만히 있어도 자꾸 손이 떨려왔는데 항불안제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이 무겁다는 느낌이 들고 졸음이 쏟아졌다. 


잠들기 직전 마지막 기억으로 아주 잠깐 편안했었던 것 같다. 


정말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았는데 아침이었다. 


내가 잠이 들었던 건가. 그 생각이 드는 찰나에 갑자기 엄청난 불안증세와 스트레스가 다시 나를 덮쳤다. 약으로 잠깐 눌러놨던 증상들이 한층 더 격렬하게 나를 덮쳤고 정말 죽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이 덜덜 떨렸다. 괜히 먹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다시 약을 먹으려던 생각을 접었다. 


이대로는 해결이 안 된다. 방법을 찾자. 


항우울제로 통화했던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잠시 잊게 해주는 거라고. 그렇게 1년, 2년 잊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상황이 바뀌고 환경이 바뀐다. 그렇게 그냥 살만해지는 때가 오면 꼭 약을 먹지 않아도 되더라. 조금 무기력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시 자기로서는 그렇게밖에 답이 없었다. 


창작을 하던 사람이었다. 날카롭던 사람이었고 반짝이던 사람이었다. 지금 와서 만나보면 그저 순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지만 본인의 말로는 색이 빠져버린 것 같은 느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이전만큼 세상이 반짝이는 것 같지도 않고 재미도 없지만 그조차 그냥 무감각해지는 느낌이라고. 


정답은 없었다. 결정만 있을 뿐이었다. 비록 고통스러웠지만 잃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방법을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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