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는 사이 내 세상은 사라져 있었다
괜히 불안한 마음을 누르면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는 아내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봤지만 통화 버튼을 누르면서도 나는 아내가 받지 않을 거라는 묘한 느낌을 계속 받고 있었다.
그래, 우선 집으로 가자.
집에 도착한 내가 느꼈던 건 아내와 아이의 온기가 아닌 기묘한 공허함이었다. 그 공허함이 어디서 오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혼란스러운 걸음으로 방문을 하나씩 열어젖혔다.
일주일 전 내가 집을 나설 당시와 다르게 뭔가 묘하게 비어있었다. 뭐가 없어졌지. 방마다 있던 가전제품들, 특히 아이와 관련된 물건들이 하나씩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옷장과 아내의 옷장 역시 비어있었다.
이번엔 조금 오래 있을 작정인가?
아내는 처가에 곧잘 가곤 했었다. 자기 본가에 가는 게 어때서?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아무도 없는 거실에 앉아 전화를 걸면 아내는 항상 본가에 있다고 했었다. 자고 간다고. 왜 말도 없이 갔냐고 물으면 피곤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되려 짜증을 냈었다.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쉬며 혼자 적막한 밤을 보냈던 게 몇 번일까.
피곤한데 왜 집에서 쉬지 않는 걸까. 이 물음을 아내에게도 몇 번 했었고 아내는 그때마다 말을 듣지 않는다는 아이와 집안일을 돕지 않는다는 나를 이유로 들었다.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들어가면 말싸움으로 이어진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내 기준에서 아이는 여느 아기들보다 말을 잘 듣는 편이었고 나 역시 내 나름의 집안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누군가의 최선은 종종 누군가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곤 한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때의 아내와 나 모두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겠지만 서로는 서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겠지.
그렇게 아내는 종종 아이를 데리고 집을 비우곤 했었고 나는 홀로 지내는 시간이 견디기 힘들었다. 만약 그때 아내에게 혼자 애 보느라 애쓰고 있는 거 다 안다고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어땠을까,라는 후회를 종종 한다. 당연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슷한 후회를 해본 사람들은 알지 않을까. 그런 말은 따뜻함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다는 걸.
어떠한 시도조차 하지 못할 만큼 나는 지쳐있었고 아내는 이미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곳보다 더 멀리 가있었다.
평소보다 더 비어있는 집안에 혼자 폰을 붙잡고 있었다.
그래도 연락을 안 받은 적은 없었는데. 무슨 일이 생겼나. 근데 왜 짐을 다 싸갔지. 얼마나 오래 있으려고 그러나.
아무 일도 못한 채로 주말이 지나갈 무렵 어쩌면 이혼소송일지도 모른다는 지인의 말을 들었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불안감이 슬슬 고개를 들며 킥킥거리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그런 거랑은 좀 다르다는 대답과 함께 지인은 변호사 사무실에 연락을 해보길 권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날 만큼 그때 그 말을 들었던 나는 어둠 저편으로 떨어지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냥 조금 길어지는 거겠지. 뭔가 화가 난 게 있는 걸까. 복잡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던 내게 변호사는 99%의 확률로 이혼 소송이 시작될 거라는 얘길 했다. 왜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정황은 서초동에서 흔히 쓰는 방법이라며 몇 가지 확인을 해줬다.
집에 있던 패물들이나 고가품들이 없어졌는가. 아내와의 연락이 되지 않는가. 최근 다툼이 있었는가. 서로 외도 상대가 있었는가. 아내가 이혼을 언급한 적이 있는가. 내가 대답할 수 있었던 질문들과 알 수 없는 질문들이 오가는 동안 나는 그래도 설마 이혼일까 하는 생각을 계속 붙잡고 있었다.
그래 계속 붙잡고 있었다. 변호사가 내 이름으로 가정법원에 올라온 사건번호를 읽어주기 전까진.
선생님, 정신 단단히 차리셔야 돼요. 선생님 지금 소송에 들어가신 거예요. 이혼 소장이 날아올 거예요. 선생님이 원하든 원치 않든 시작되고 결정 납니다. 정황상으로 봐서 상대방은 오랫동안 준비했어요. 선생님은 지금 아니라고 믿고 싶으실 수도 있는데 그런 거랑 상관없이 소송은 진행될 거예요. 아내분에게 불필요한 연락은 자제해 주시고 소송이 시작되기 전까지 모든 행동은 저희와 상의 후에 해주세요.
제 딸은 어떻게 되는 거죠? 아내분께서 작정하고 데려가신 이상 마음대로 데려가실 수 없습니다. 양육권을 정식으로 신청하시는 수밖에 없어요. 당시 나에겐 이 말이 가장 충격이었다.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살고 있던 세상은 사라졌고 끝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의 입구 앞에 서있었다.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되찾을 수 있을까.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렇게 그 터널 속으로 나는 걸어 들어갔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그래도 이 방법 밖에 없다는 어두운 희망이 섞인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