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온 Oct 14. 2023

소송이 길어지는 이유

금방 이혼할 수 있을 것 같죠

아직 한국사람들에게 소송은 조금 낯선 단어인 듯하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우선 한국사람들 자체가 문화적으로 그렇게 공격적인 사람들은 아니다. 어느 나라는 뭐만 하면 총 꺼내 들고 설치거나 칼로 누군가를 찔러대는데 이 나라는 갈수록 주먹다짐도 잘 안 한다. 냄비근성이니 뭐니 조롱해도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순한 편이다.


두 번째는 소송을 거는데 진입 문턱이 조금 높다. 물론 법을 조금 아는 사람들에게는 수월할지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소송을 걸 일도 휘말릴 일도 없이 살아가다 막상 닥쳐야 변호사를 찾아가는 정도다. 그리고 변호사 수임료는 예상보다 항상 비싸고 소송 자체가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동반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애초에 꺼린다.


소송이 발달한 미국은 변호사의 최초 수임료가 생각보다 낮고 소송이 진행됨에 따라 부분적으로 청구되거나 승소 후 지급하는 잔금 비율을 높이는 등 생각보다 탄력적으로 정할 수 있기 때문에 진입 문턱이 낮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이혼을 할 때 합의이혼으로 진행하며 피치 못한 경우를 제외하면 어지간한 경우라도 합의이혼으로 결정한다.


아내는 내게 한날 갑자기 이혼소송을 걸었다.


처음엔 내가 무슨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나 싶어 공황에 빠졌었는데 내가 소송을 안 겪어봐서 벌어진 성장통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 아내의 의도는 내가 합의이혼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해 법률사무소에 의뢰한 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이혼을 확정 지을 수 있는 방법들로 소송을 걸어 결혼생활을 끝내는 것이었다.


법원의 도장이 찍혀 도착하는 소장에는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되는 인간말종의 전기가 적혀있다. 행여나 누군가 나중에 경험했을 때 열어본 자신이 없다면 변호사에게 얘기해 걸러서 보내달라고 부탁해도 된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어디까지 예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해보면 굉장히 지저분하다. 내가 여태 의도적으로 해왔던 행동이든 아니든 상대방이 기억하는 내 모든 행동들이 칼날이 되어 꽂히는 느낌이다. 화가 나서 뱉었던 말 한마디부터 딴에는 기분이 좋아 상대를 위한다고 했던 행동들까지 모두 부정당한다.


지나고 나면 좋은 경험이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악의를 품으면 어떻게 되는지 배웠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멀어질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글 몇 자, 말 몇 마디가 사람을 얼마나 흔들어놓을 수 있는지, 그동안 나는 내가 걸어온 길에 얼마나 확신이 있었는지도 검증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부분을 누군가에게 조언해 준다면, 그리고 당시 나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니체의 유명한 구절을 들려주고 싶다. 괴물을 상대하면 스스로도 괴물이 되고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나를 본다는 그 구절. 똥이 묻을까 봐 피하고 싶지만 이상하게 냄새는 맡아보고 싶은 유혹.


사람들은 이 사회의 시스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법은 생각보다 덤덤하다. 문화나 정서와 별 상관없이 법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누구의 편도 딱히 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여론이 어떻건, 아내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건, 남편이 얼마나 떳떳하건 상관없이 정해진 숫자와 매뉴얼대로 기여도를 책정하고 시스템이 정해놓은 어느 선에서 판결을 내린다.


형사 처벌이 걸려있는 정도가 아니라면 상대방의 일방적인 주장이나 증거가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증거가 없더라도 정황에 대한 진술이나 부분적인 정황들로 미루어 누군가의 유책보다는 서로에 대한 갈등이 얼마나 깊어진 정도였었는지 정도만 가늠한다.


아내의 진술은 나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했지만 법원 입장에서는 딱히 형사처벌로 이어질만한 행동은 없었다고 판단해 아내가 나와의 결혼생활을 불만족스러워했다는 정도로만 결론지었다.


나는 아내의 진술에 대한 반박이나 해명 정도에서만 그치고 아내에 대한 비난은 최대한 미뤘었다. 사실 기분이야 나 역시 아내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걸 끄집어내 똑같은 색으로 칠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었지만 서글퍼서였을까. 등신인가. 모르겠다. 결국 그렇게 하진 못했다.


정말 오랫동안 고민 후 나는 기각을 요청했다. 다시 같이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끝을 내더라도 이런 식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고집 비슷한 거였다. 언젠가 조사관이 내게 기각을 청구하는 이유를 물었었다. 정말 다시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고.


노력하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원하면 노력하겠죠 서로. 당시 조사관이 내 대답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대부분의 이혼소송은 1년 정도 걸리고 짧은 경우 6개월 정도로 알려져 있다. 재산분할이나 위자료, 양육권 등에 불만이 있는 경우 항소를 하게 되면 더 길어진다. 최대 3심, 3년까지 가는 게 보통이다.


내 경우엔 1심으로 이미 2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생각보다 이혼하는 부부들이 많아 한번 판결이 밀리면 몇 달씩 밀리기도 하고 사소한 부분에서 추가적으로 진술을 내야 하는 경우 또 연장되는데 그러다 보니 벌써 해가 두 번이나 넘어가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서로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자꾸 마찰이 생기고 법원은 이 마찰들이 완화될 때까지 계속 시간을 내어주는 입장이기 때문에 길어진다고 생각한다.


흔히 사람들은 법원이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결정해 준다고 생각하지만 이혼소송에 있어서 법원의 역할은 조율하는 기관이자 서로의 주장과 결정에 공증을 서주는 입장으로 한발 물러나있다.


나는 기각을 주장하고 아내는 이혼을 주장하니 서로 좁혀지지 않는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별거기간이 길어져 법원에서는 결국 이혼을 선고한다. 더 이상 가정이 지속될 수 있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 기간이 약 3년에서 4년 정도로 알려져 있다.


지난한 시간이다. 합의이혼이 빠르다. 정 아내가 빠른 이혼을 원한다면 변호사를 통해 합의를 요청해도 된다.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희망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다른 의도가 있는지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결혼생활이 싫었고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고 싶었으리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행복과 불행은 상대적이다.


나에겐 아내와의 성격차이로 인한 마찰과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나 자신을 갈아 넣어가며 보내야 했던 시간들마저 행복이었다면 아내에겐 평범함마저 불행이라고 여겨지지 않았을까.


결혼하기 전 혼자였던 나는 외로웠고 고독했다. 불행했고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결혼 후 월세로 살던 집마저도 내겐 보금자리였고 졸음을 참아가며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던 그 길마저 환하게 빛나는 느낌이었다.


아내는 그 반대에 서있었을까. 나에겐 한없이 어둡게 느껴지는 이 시간들마저 그 사람에겐 이전보다 밝은 곳일까. 그래서 그렇게 모질 수 있었을까.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까. 난 차마 당신에겐 모진 말을 하지 못했지만 당신은 내게.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일까. 여기까지 와버린 것을. 내게 그 어두웠던 터널마저 이제는 익숙해지고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당신 역시 잠시 밝아지는 듯했던 주변이 다시 어두워지는 경험을 하겠지. 악담은 아니야. 하지만 낮이 있는 게 밤이 있기 때문인 것처럼 시계추는 끊임없이 돌고 돌지.


당신이 지난 시간 동안 낮에 살고 있었다면 이제 저녁이 옵니다.


누군가에게 조언을 한다는 건 참 어렵다. 절대적인 건 없다고 생각하는 성격이라 그런 듯하다. 결혼을 유지하는 5가지 방법 같은 걸 잘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놀랍다 못해 미친놈들인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비슷한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꼭 이혼이 아니더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끝은 온다. 당신이 끝이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이 끝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조금 더 걸어보라. 만약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면 이미 그것이 끝났기에 당신이 깨달은 것이리라.


소송기간이 얼마나 길든 합의이혼이 편하다고 생각하든 그거랑 아무 상관없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고 상황은 언제나 한발 느리게 펼쳐질 뿐이다.


당신이 아느냐 모르냐의 문제지.

이전 07화 말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