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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온 Sep 06. 2023

공감능력

그저 외로운 거라고

이혼 소송 중이라는 얘길 주변에 하면 사람들은 쉬쉬하며 나에 대해 조심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더러 있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이혼을 생각 중이라며 여러 가지를 되물어온다.


난 여전히 이혼을 가장 마지막 선택으로 두는 편이기에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라 권하면 사람들은 애를 써가며 내게 자신이 이혼을 원하는 이유들을 말한다.


대부분 상대 배우자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여러 사례들을 함께 얘기한다. 무대와 상황만 바뀔 뿐 같은 주제에 대한 일들이다. 누군가는 가사에 무관심하다던지, 누군가는 육아에 무관심하다던지, 상대 배우자의 직업이 마음에 안 든다던지, 시댁이나 처가와 맞지 않아 너무 싫다던지, 그 와중에 상대 배우자는 자신과 대화가 통하지 않아 이럴 거면 같이 왜 살까, 다시는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 등


요즘 트렌드라 그런지 다들 뒤에 묘하게 '그 사람은 원래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이라' 정도의 설명을 붙인다.


나는 이 말이 본인을 더 불행하고 만든다고 생각한다. 공감은 능력이 아니다. 원한다고 가질 수 있고 원치 않는다고 스위치를 끌 수 있는 기능이 아니다. 나는 공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확신할수록 상대 입장에서는 공감받고 있지 못한다는 좌절감만 더 키울 수 있다.


당연히 남에게 기대할 수 있는 능력이 애초에 아니다.


공감은 경험 속에서 자란다.


같은 상황에 놓였던 경험,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경험, 그 속에서 고민했던 시간과 노력, 끝끝내 좌절해야 했던 순간, 나를 아끼던 모든 이들의 도움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공허감, 무력감에 덮어둔 채 눈을 돌려야 했던 비겁함, 우연히 찾은 빛, 조금씩 주변이 하나씩 생기를 찾아가던 과정, 비록 이전과 같지 않을지라도 만족할 수 있는 마음, 어느덧 새롭게 열린 문으로 들어갈 때의 설렘, 다시 찾아오는 고민들, 이전보다는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된 순간 등.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피고 지는 감정들을 기억하는 만큼 상대의 마음도 알아차릴 수 있는 그릇이 커진다. 알아차리는 순간부터 또 새로운 실수들을 연발한다.


섣불리 아는 척을 하게 된다던지, 걱정되는 마음에 준비가 되지도 않은 상대에게 앞선 도움을 준다던지, 그로 인해 오히려 감정의 화살을 본인에게 돌려 결국 본인이 상처를 받으며 끝나는 등 알아버린 것들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만약 여기서 마음의 문을 영원히 닫아버리지 않고 조금씩 걸음을 내디뎌 간다면 사람들이 환상의 동물들처럼 찾는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이 되어간다. 상대를 잘 헤아리고 숨 쉬듯 자연스러운 선에서 친절을 베풀다가도 어느 선에서는 조용히 물러나 서로를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당연히 완벽은 없다. 다만 완성에 가까운 형태로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다가갈 뿐인가. 당장의 매뉴얼 몇 개를 지키는 차원이 아니라 모든 흐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본인조차 자신이 친절한 사람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도인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공감능력에 대해 떠들기 좋아하고 마당 앞에 모인 참새들처럼 짹짹거리면서 영양가 없는 대화들을 남발하며 그걸 사회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공감능력은 오지랖도 아니고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려도 아니다. 한 사람이 가진 그릇의 크기다. 상대가 가진 그릇의 크기를 강요할 수도 없고 기준을 정할 수도 없다.


상대방이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이해받고 싶은 것 아닐까. 상대 역시 내 사정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 아닐까.


내가 애초에 상대의 그릇도, 상황도 이해하지 못했기에 상대가 해줄 수 없는 공감을 바라고 있는 것 아닐까.


상대가 해줄 수 있다 한들, 친절은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다. 어느덧 공감과 배려라는 단어를 무기처럼 쓰는 세상이 된 듯하다. 상대에게 강요하고 들어주지 않으면 그 무기들로 깎아내린다.


내가 그랬다.


내 상황을 이해해주지 않던 아내가 미웠고 대화가 통하지 않던 아내가 답답했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불평하던 아내가 한심했다. 아내의 소장에는 거울 반대편의 내가 있었다. 아내는 지난 몇 년 간 자신이 공감능력도 없고 사회성도 없는 사람과 살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능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참 외로운 사람들이었나 보다.


얼마 전 아이와 함께 청계천의 돌다리를 건널 때 아이는 내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돌다리 사이사이의 간격은 그리 넓진 않았지만 물살이 제법 있어 조심스러웠는지 손을 꼭꼭 쥐어가며 개울을 몇 번이나 왕복했다.


다섯 번째쯤 되자 아이는 이제 내 손을 빌리지 않고도 혼자 돌다리를 폴짝거리며 재밌다는 듯 웃어댔다.


사람들은 공감능력을 원하는 게 아니다. 혼자 개울을 건널 수 있을 때까지 잡고 있을 손이 필요할 뿐이다. 거창한 것을 바라며 좌절할 필요가 없다. 잠깐 기댈 수 있는 안도감이면 된다.


몸만 커버린 아이들. 우는 내게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엄마의 품. 붐비는 사람들 사이로 번쩍 들어 올려 안아주는 아빠의 든든함.


사실 원하던 건 그런 거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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