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딸 서윤이

어린 생명이 한 사람을 바꾸는 놀라움에 대하여

by 레스더

한가로운 주말 오후 친구에게 영상 통화가 걸려온다. 전화를 받기 전부터 나는 한껏 들뜬 얼굴로 폰을 터치한다.

"여보떼요? 어디야? 밥 먹어떠? 서윤이네 놀러 와~"

쉬지 않고 본인 말부터 하는 어린아이를 보며 역시 이 아이는 내 친구의 딸이구나 싶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서윤이 말에 맞춰 다양한 표정과 소리로 아이를 웃게 한다. 어린아이에게 온갖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눈높이에 맞은 영상 통화를 하는 것이 여전히 익숙한 풍경은 아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나는 아이들에게 무관심했다. 떠들거나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면 나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생기고 그 자리를 피했다. 그래서 스스로 나는 어린아이들을 싫어한다고 정의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싫어하는 감정이 아니라 무서운 감정이었다.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자기주장만 하는 생명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랐던, 혹시 내가 더 울릴까 봐 염려스러운 무서움이었다. 이런 나에게 새로운 느낌을 준 아이가 바로 가장 친한 친구의 딸, 서윤이다. (그리고 그 후 다른 아이들도)


친구가 임신했을 때만 해도 그저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중에 나 다음으로 가장 아이와 멀게만 느껴졌던 친구가 임신이라니. 친구의 배가 불러올수록 가늘고 길쭉한 친구의 팔다리가 지탱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러건 어느 무더운 여름날, 회사 업무 시간에 친구의 출산 소식을 듣게 되었다. 친구와 통화하며 순간적으로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흘렀다. 산모와 아이가 모두 건강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철없던 친구가 아이를 낳았다는 벅찬 감동, 아플 친구를 생각하니 안쓰러운 마음 등이 복합적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역시 자기애가 강한 친구답게 출산 당일에 SNS에 아기 사진과 퉁퉁 부은 본인 얼굴도 올렸다.


서윤이를 처음 만난 날은 그로부터 약 한 달 뒤였다. 내 평생 갓난아이를 그렇게 오래 본 적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이날 처음으로 아기를 안아봤다. 어색함과 불안한 내 팔뚝의 감촉, 울다 웃기를 반복한 서윤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기가 우는데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의 울음을 웃음으로 바꿔주고 싶다는 강한 충동만 떠올랐다. 생경한 순간이었다. 아기가 잠깐이라도 내게 웃음을 지어줄 때면 강력한 행복감이 밀려들어 왔다.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작은 행동만 해도 많은 이들이 먼저 사랑을 내어주는 것. 특히 나 같이 아기에 무관심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날 이후에도 종종 서윤이를 보러 갔다. 그때마다 아기는 아이로 진화하고 있었다. 자기 목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아기가 뒤집기를 했고, 손과 발로 겨우겨우 기어 다니던 아기가 두 발로 서서 우다다 뛰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화려한 연보라 색에 빠져 자기 생각을 또박또박 말하는 어린이가 되었다.



서윤이를 통해 나는 새로운 생명, 그리고 아이가 주는 신비함과 기쁨을 알게 되었다. 이 작은 아이가 표현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감탄하게 되고, 새롭게 배운 말을 내게 할 때면 그렇게 웃기고 감격스러웠다.


어른으로서 우리는 작은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성장시킬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어줘야 한다. 내가 많은 좋은 어른들 덕분에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처럼, 나도 내 다음 세대에게 그렇게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커진다. 책임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을 존중하는 최소한의 마음과 태도다. 나는 지난날 공공장소에서 운다고 그 부모와 아이를 째려보던 내 행동을 깊게 반성한다. 내 그런 태도도 무언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그리고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생명이 주는 놀라운 기쁨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렇다고 당장 내가 아이를 갖고 싶다거나 모든 아이들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것은 아니다. 내 주변 아이들만큼은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씨앗이 마음에 심겨 자라난다.


나에게 이런 마음을 준 서윤이에게 이 글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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