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를 금대리라고 부르는 이유
딱 4년만 버텨봐. 딱 대리만 달아봐. 회사에서 알아서 모셔간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처음엔 허무맹랑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겪어보니 정말이었습니다. 목 빼고 기다릴 땐 나 몰라라 하던 연락이 대리로 진급하자마자 제 발로 찾아왔습니다. 4년을 꽉 채우고서야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회사로 이직했습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에서 인턴 1년. 20명 남짓 되는 회사에서 사원 1년. 그보다 조금 큰 회사에서 사원 1년 2개월. 또 그보다 더 큰 회사에서 사원 2년. 4년 동안 총 네 개의 회사를 다녔습니다. 사실 저만 알고 있는 한 곳이 더 있습니다. 팀원들에게 시킨 일을 2주가 넘도록 확인조차 않는 팀장님 밑에서 버티고 버티다 도망치듯 빠져나왔죠. 2주 치 월급은 안 받아도 괜찮았습니다. 그 돈으로 세상을 배운 셈 쳤습니다.
사원으로 들어간 첫 회사는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곳이었습니다. 윗사람 비위만 잘 맞추면 어렵지 않게 승진할 수 있었고, 그렇게 승진한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팀원들에게 고루 배분해주었습니다. 아랫사람들만 죽어나는 구조였죠. 퇴근 시간이 되면 저녁 먹고 오겠다고 나가서는 술냄새 풀풀 풍기며 복귀하는 선배, 부사수에게 보고서 정리를 시켜놓곤 보고 당일이 되면 홀랑 발표해버리는 선배, 퇴근할 때까지 자리에 앉아 미드만 보는 선배, 밥 다 먹고 술 다 먹은 후 협력업체 불러 계산시키는 선배까지. 기가 찰 정도로 부끄러운 선배들이 많았지만 우리 팀 상황은 조금 나은 편이었습니다. 직급에 맞는 책임감을 가진 분이 계셨거든요. 덕분에 1년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이직을 하자마자 저도 다른 자리를 구했지만요.
사원 신분으로 면접을 볼 때마다 약간의 고충이 따랐습니다. 겨우 사원 밖에 안 되는 사람이 우리 회사에 와서 얼마나 일을 하겠냐는 눈빛들. 저도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닙니다. 워낙 작은 회사에서 시작한 탓에 직군 구별 없이 닥치는 대로 일해야만 했고 오히려 그게 플러스 요인이 되었어요. 이것저것 시키기 좋은 사원으로 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꼬박 4년을 버텨 대리를 달았습니다. 고작 하루 차이인데 사람들의 대우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대리라고 함은 그래도 어느 정도 일이 돌아가게 만드는 사람, 어느 정도 쓸 만한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라는 인식 때문인 듯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습니다. 사원인 저와 대리인 저는 그렇게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았거든요. 똑같은 아이디어를 내도 사원이라는 이유로 또 대리라는 이유로 어째서 다른 시선을 받게 되는 건지 의아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자 차장을 단 선배는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대리를 왜 금대리라고 부르는지 아니?
일 재밌지. 부담 적지. 불러주는 곳 많지.
차장부턴 그게 안 돼. 차장부턴 쭉 그런 자리뿐이야.
저는 이제 5년 차입니다. 재작년까지 제 소원은 '대리'였지만 올해 소원은 '만년 대리'입니다. 적당히 무시받지도 않고 적당히 부담스럽지도 않은 만년 대리. 일이 많은 만큼 속상할 일도 많지만 그냥 열심히 달리기만 하면 되는 만년 대리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