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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내음 Jul 21. 2017

16.Tadapani: 멀리 있는 물

입산 3일째 되는 날이다. 방 창밖을 보니 날씨가 좋아 저 멀리 설산이 눈에 들어온다. 왠지 고레파니에서 이 방이 가장 좋은 풍경을 가진 방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간 밤엔 창밖으로 그 많은 별을 혼자 보다 잠이 들었더랬다. 이 이쁜 경치를 두고 다시 길을 나선다.


오늘 가야 할 곳은 '타다파니'. '고레파니'의 뜻이 말에게 물을 먹이는 곳이라면, '타다파니'는 먼 물이라는 뜻이다. 물 먹으러 가는데 너무 멀어서 지어진 이름인데, 여기서부터 5시간을 걸어야 물을 만날 수 있으니 그 이름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안나푸르나로 가는 길에는 층층 돌계단이 정말 셀 수 없이 많다.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고. 계단이 없었다면 더 힘들게 올라가겠지? 이 돌을 일일이 날라다 맨손으로 층계를 만들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케이블카 없다고 투덜거리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그 층층계단을 허벅지 터질 듯 올라 온 뒤에 보는 탁 트인 이 풍경. 구름이 발 밑에 있다. 이 곳은 해발 3000m에 가깝다.

고레파니에서 타다파니로 넘어가는 길, 거의 유일하게 히말라야 산들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고도가 높으니 추운 날씨이기는 한데, 햇살이 들면 뜨겁다. 걸어가면 덥고, 쉴 땐 금방 추워지는 곳.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 이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이 사진에 계신 분들과 동행하게 되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람이 들어간 풍경을 찍었기 때문에 이분들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도 여행이 끝나고 사진 정리를 하면서 발견하게 됐다. 사실 이런 구도에 내가 찍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며 찍은 사진이다.

모두가 들고 온 배낭을 풀어놓고 잠깐 쉬면서 히말라야를 내려다보는 곳. 꾸역꾸역 올라온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아~ 반가운 로지로구나. 긴 여정에 잠시 쉬어 가는 이 시간들이 천국 같다. 오늘의 목적지 타다파니의 고도는 2710m. 조금 내려왔을 뿐인데 주변 수풀이 우거진 모습니다.  

뭐 반찬이 없는 것 정도야 상관없다. 한 번도 닦지 않은 것 같은 먼지 쌓인 테이블 위면 어떠랴. 배탈 나지 않는 음식이면 감사할 뿐이다. 살짝 향이 강한 카레와 밥. 코를 막고 먹고, 한 입 먹고 물 마시고. 밥 먹는 건 전쟁 같지만 굶는 건 지옥 같겠지? 이미 음식 재료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특별히 이상한 것은 아니지만 물어봐서 알게 돼도 썩 도움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점심 후에 핫초코 한 잔이면 행복하다. 

매번 손 씻는 게 쉽지 않은 환경인데 가지고 간 코인 티슈가 요긴하게 쓰인다. 마실물 조금 덜어 물수건을 만들면 손도 닦고, 테이블도 살짝 치울 수 있다. 

에너지 충전을 했으니 다시 또 걸어 볼까나.

대부분 산속에 있는 로지는 산행객들에게는 머물 수 있고, 식사를 하는 곳이지만 로지에 사시는 분들은 손님이 있거나 없거나 그들의 삶의 터전이다. 로지가 한 장소에 멀지 않게 모여 있는 걸 보면 그들은 서로 돕고 사는 생활 공동체인 셈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산속에 매일 같은 날들을 살아야 한다.

앗! 이거슨?? 이 산골짜기까지. 스위스 융프라우 전망대에서 먹은 컵라면보다 더 반갑다. 설마 다음 로지에도 있겠지? 그냥 보기만 했을 뿐인데 정말 반갑구나. 

산을 걸으면서도 마음이 편안했던 건 아마도 산이 우리나라 산과 많이 닮아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동남아시아에 있는 산들은 산이라기보다 악어 나오고, 도마뱀 나오는 정글에 가까웠으니까. 

나무도, 흐르는 계곡도, 바람도 매우 익숙한 느낌이다.

보기만 해도 주저앉을 것 같은 무게의 짐. 이걸 짊어지고 도대체 몇 개의 산을 넘는 것이냐. 당나귀가 가지 못하는 길은 이렇게 사람들이 짐을 나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밥 한톨도 남기는 게 얼마나 죄스러운지. 한 번 들어 봐도 되냐고 물으니 그냥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한다. 시도는 해 봤으나 바닥에서 떨어지지도 않더군.

아, 바로 저 코 앞이 오늘의 목적지 타다파니로군. 가끔 이런 갈림길이 있는데 포터나 가이드가 없으면 길을 헤매게 될 수 있다. 딱히 친절하게 영어로 된 안내판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첫 번째 머물렀던 곳도 '슈퍼뷰'였는데. 새벽 푼힐에 다녀온 2시간을 포함해 전체 7시간을 걸었다. 씻고 쉬고 싶은 마음뿐. 


하늘이 곧 비가 올 모양새다. 여러 루트가 만나는 지점은 제법 마을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라잔이 원래 가려던 로지는 이미 방이 없다. 다행히 두 번째 알아본 집에서 방을 구했다. 밥을 짓는지 온 동네에 음식 냄새들이 난다. 

타다파니 주변의 트레킹 맵이다. "Don't miss the heaven of this world"라 적힌 말을 보고 살짝 눈이 가긴 했지만 다시 루트를 바꾸긴 어렵다. 게다가 이 맵은 내가 가야 할 방향과 좀 많이 다르다. 해 뜨고 지는 모습이 장관이고, 25개의 산을 파노라마로 볼 수 있는 곳이라는 자세한 설명에 좀 아쉽긴 했다. 흠. 야크와 호랑이도 볼 수 있다고?

방 문을 밖에서 잠글 수 있게 돼 있다. 안에서는 안 잠기면 겁나고, 밖에서 잠글까 봐 또 겁나고. 문 턱은 무릎 정도로 높아 건너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정말 침대 하나 덜렁 있는 방. 밤엔 저 창문과 문틈으로 얼마나 찬 기운이 들어 오든지. 가방에 있는 옷을 모두 꺼내 입고 침낭 속에 들어가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잤는데도 다음날 온몸이 쑤신다. 오래 자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추워서 아침이 되기만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로지의 저녁시간이 하루 중 사람을 가장 많이 보는 시간이다. 모두 동일한 길을 가도 각자 움직이는 시간이 다르다 보니 오는 길엔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인데, 로지에 도착해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하나 둘 식당으로 모인다. 나무를 태워 피우는 난로 덕분에 실내가 나무 연기로 뿌옇다가 점차 빠지고 있었다. 그 위로는 빨아 놓은 양말과 수건들이 쭈욱 걸려 있고, 음식을 기다리면서 옆 사람들과 인사로 시작한 수다로 따듯한 온기가 채워진다. 언어도 가지각색이고 이 곳에 온 이유들도 가지각색이다. 사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겠다는 신념으로 홀로 무작정 와서 포터를 구해 온 것인지라, 가능하면 친구를 만들고 싶지 않았더랬다. 좀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특히 한국사람들과 얘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남 일에 참견을 많이 하는 한국사람들의 질문이 너무 뻔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혼자 오셨어요?', '목적지는 어디예요?', '얼마나 계획을 세웠어요?', '여자 혼자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 가장 싫은 건, 한국사람들의 집단생활에 끼고 싶지가 않았다. 한 번 알고 나면 계속 서로 챙기고, 같이 가고 싶어 하는 일반적인 성향들, 나이로 만들어지는 수직관계.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다. 포터와는 영어로 얘길 하던 참이라 굳이 한국말을 쓰지 않아도 되었던 터라 한국말이 들리면 자리를 살짝 피해 앉았다. 그러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말레이시아 부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 묻길래 한국인이라 했더니 너무 반겨하며 전날부터 알게 돼 여기까지 같이 온 한국사람이라며 뒷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을 굳이 소개해 준다. 인상도 좋으시고 그분들조차도 산을 타던 중에 만나서 서로 알게 된 분들인데 같이 ABC로 가시는 중이라고 했다. 많이 친해지지 않으려 말을 아꼈다. 각자의 얘길 듣다 보니 어떤 한국분은 이 곳에 오려고 1년이 넘도록 준비한 분도 계셨고, 폴란드에서 온 고등학교 여학생 둘은 자원봉사 때문에 네팔에 왔다가 즉흥적으로 올라와 봤다고 했고, 굳이 신혼여행 허니문을 이 곳으로 온 말레이시아 부부. 가장 눈길을 끌었던 건 70에 가까운 연세의 조용한 성품의 일본인 여자 어르신이었다. 원래 학교 선생님이셨고, 은퇴 이후에 꼭 하고 싶었던 것이어서 어렵겠지만 내년이면 더 어려워질테니 갈 수 있는데 까지 가 보려고 혼자 오셨다고 했다. 솔직히 걱정도 됐지만 감동적이기도 했다. 다행이 일본어 잘 하는 포터가 짐을 들어주고 가이드를 해 주는 중이었다. 부디 여행을 잘 마치셨기를. 얘길 듣다 보니 사람에게 주어지는 '때'란 '나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주어진 환경이나, 품어왔던 꿈들이 자신의 의지를 만났을 때가 바로 '그때'가 되는 거다. 피곤했지만 그날 밤의 수다는 꽤 늦은 시간까지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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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오르고 내리는 히말라야 같은 것이다 by 바람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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