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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내음 Jul 22. 2017

17. 다리를 건넌 다는 건,

산행을 시작한 지 4일째 되는 아침이다. 매일 해가 뜨고, 종일 걷는 것이 반복되지만 눈에 보이는 풍경이 달라서 그런지 정말 새로운 날들을 맞이한다. 아침 햇살이 기지개를 켜듯 구름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더니 잠들어 있는 산자락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저 너머에 보이는 마차푸차레는 좀처럼 가까워지는 것 같지 않다.

타다파니도 여러 갈래길이 만나는 곳이지만, 오늘의 목적지 촘롱은 ABC를 가는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가는 지점이고, 고도가 비교적 낮은 곳에 있다.

산행을 며칠째 하다 보니 규칙이 생겼다. 일명 '6,7,8법칙'. 6시에 기상, 7시에 식사, 8시 출발.

그 아침에 햇살은 정말 따사롭고 눈부시다. 날씨가 그런 건지, 장소가 그런 것인지 유난히 따가운 햇살에 결국 얼굴 전체를 뭔가로 가려야 했다. 선글라스가 없으면 눈이 너무 부시고, 얼굴에 햇살이 바로 닿으면 따끔 거리기까지 한다. 얼굴을 내놓고 다니면 코부터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다 까맣게 그을리는 걸 경험할 수 있다. 땀을 흡수시키거나 찬 바람으로부터 목을 보호할 겸 해서 가지고 다니는 버프는 이럴 때 매우 유용하다. 간혹 한국 아주머니를 만나면 멀리서 봐도 알 수가 있다.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만들고 살 수 있는 눈에 구멍 뚫린 마스크를 쓰고, 빨주노초파남보 화려한 컬러의 등산복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역시 산에 오르는 맛은 이렇게 내려다 보이는 풍경 때문이겠지? 구름이 나와 같은 높이에 있다.

이 정도 햇살과 바람이면 반나절도 안 돼서 널어놓은 빨래가 바싹 마를 것 같다.

오르막 길을 가다 뒤 돌아봤을 때 이런 풍경은 흐뭇하기 그지없다. 지금 이 풍경은 내리막 길을 가야 하는 상황에서 보니 아쉽기도 하고 한편 뭐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죽어라 며칠을 올라왔는데, 저 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고? 그리곤 다시 강을 건너 다음 산을 올라야 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여기가 '구루중'쯤 되는 것 같다. 고도 2050m. 전날 푼힐이 3210m니 1000m 이상을 내려왔다.

오전 내내 내리막길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산을 하려는 게 아니라 다음 산을 가기 위해 잠시 내리막을 걷고 있는 것이다. 들고 가는 배낭 무게 때문인지, 내리막이라 좀 덜 힘들어서 그런 것인지 발걸음이 자꾸 빨라진다. 그러다 발을 헛딪어 넘어지면서 오른쪽 발목을 살짝 삐끗했다. 이제 겨우 가야 할 목적지에 절반쯤 왔고, 목적지에 닿으면 갔던 길을 돌아와야 하는데 다리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다. 잠깐 앉아 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죽어라 올라갔던 곳을 죽어라 내려오는 게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 한 번 올라갔다 내려오면 끝나는 게 아니라 수 없이 오르고 내리 고의 반복이 되는 인생. 바닥까지 내려와야 다음 산으로 넘어갈 수 있고, 다음 산은 지금 산 보다 더 높을 수도 있고, 산 정상이 좋아 그곳에 머물면 다음 산으로 영영 갈 수 없고, 긴 여정을 가려면 쉬운 길에서 방심하면 안 된다는 그런 생각들로 마음을 다시 재정비해 본다. 정상에 산다는 건, 너무나도 위험하고 외로운 일이지 않은가. 내려다 보이는 풍경의 아름다움은 잠시, 비바람을 그대로 맞딱뜨려야 하고, 산 아래 문명을 누릴 수도 없다. 스스로 자급자족을 해야 하고, 평생 같이 사는 가족과 이웃 외엔 모두 지나가는 뜨내기 같은 사람들만 보게 된다.

다리를 건넌다는 건, 산 하나를 지나왔다는 얘기고, 새로운 세상을 시작한다는 얘기고, 바닥부터 다시 오르막이 시작이란 얘기고, 목적지에 가까워져 간다는 얘기고, 가던 길이니 처음 오르는 것보다 쉽다는 얘기다.

 다리를 건너 조금 올라오니 산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철망으로 된 담장이 있는 건물이 보인다. 학교였다.

이 산 중에 처음 본 학교다. 우리나라 농촌에 아이들을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하면, 이 산 중에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뭉클하기도 하다. 기웃거리며 사진 찍는 내가 수상썩어 보였는지 나타나신 선생님과 잠깐 얘길 나눴다. 총 29명의 학생이 있고, 그 중 7명이 결석이란다. 걷는 것 외에 달리 이동 수단이 없는 이 곳에선 결석도 일상이다. 어릴 때 부터 산타는 일에 단련된 아이들이라 커서 포터를 하는 아이들도 많고, 사실 이 산중에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으니까. 

한 교실에 몇 명 앉기 어려울 것 같은 곳. 전기불도 보이지가 않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학교에 오는 아이들이 기특하다. 몇 명 안 되는 학생들을 가르치려 출근하는 선생님도 훌륭하다.

겨우 한 번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투덜거리는 이 길을 그 아이들은 거의 매일 등하교를 하고 있다. 이쁘게 교복까지 차려 입고 말이지. 학교 정문 옆에 있는 메시지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큰돈은 아니지만 뭐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기부금을 살짝 넣었다. 따라오던 라잔이 날 곰곰이 본다. 뭔가 얘기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이가 나라의 보배고, 교육이 나라의 경쟁력이라며 얘기하는 잔소리 같은 내 수다를 웃으며 듣고 있던 라잔에게 이때부터 한국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스물두 살의 라잔은 포터나 가이드로 여러 차례 히말라야를 오르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이 일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특히 ABC 코스에는 한국 손님이 많은데, 한국 사람들은 돈도 제법 쓰는 편이라 선호한다는 얘기도 들었던 터라 경쟁력을 갖기 위해 한국말을 배워야 한다며 반 강제적으로 숫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남은 일정 동안 나는 네팔어로 숫자 세는 법을, 라잔은 한국말로 숫자 세는 법을 외위기로 했다. 최소한 손님이랑 돈 얘기할 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며. 귀찮았을지도 모르지만 열심히 듣고 따라 하는 라잔 덕분에 걷는 시간이 그리 지루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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