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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내음 Aug 03. 2017

26.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의 하루밤. 폭신한 침대는 커녕 찬바람 휭휭 들어 오는 방이지만 목적지에 왔다는 마음 때문인지 편안한 밤을 보낸 것 같다. 물론 목표했던 최종 목적지까지 오니 남은 핫팩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던 것도 한 몫 했다. 침낭에 몇 개 넣고 자니 훨씬 따듯하더군. 물론 씻을 수 없는 게 가장 힘든 일이긴 하다. 여기선 고산병이 아니라도 가스는 물론이거니와 물 자체를 끌어 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허허벌판에 바람막이 벽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아침에 두 시간쯤 추위에 벌벌 떨며 사진을 찍고 난 뒤라 몸이 다시 얼어 있었다. 아침식사와 함께 핫초코 한 잔. 그리고 라잔이 가져온 사과 접시. 포카라에서 출발할 때, 귤과 사과를 한 아름 사들고 와서 뭘 하려고 하는 건가 싶었는데, 올라오는 동안 힘들 때마다 귤을 하나씩 건네주고, 로지에서 식사를 할 때마다 이렇게 손수 사과를 깎아 가져다주었다. 아무 말 없이 베푸는 호의는 받는 사람은 잘 모를 때가 많다. 그동안 식사를 하고 과일이 나올 때마다 로지에서 만난 사람들이 부러운 눈길로 쳐다볼 때서야 내가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메뉴에도 없으니 사 먹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고, 심지어 통으로 된 사과가 아니라 이렇게 이쁘게 깎아서 내 앞에만 쓰윽 내밀어 주던 사과. 산속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을 그 무게를 감당하며 들고 오면서 내가 지칠 때마다 이렇게 격려를 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ABC에서 아침식사 뒤에 마지막 사과라며 가져다주는 라잔. 그야말로 감동이다. 

옆 테이블에 또 다른 한국팀이 있었다. 여러 사람이 같이 올라온 듯한데, 목표지점에 온 기념으로 소주로 건배를 하고 계셨다. 사실 겨울 태백산에 오를 때면, 해돋이를 본 뒤에 위스키나 막걸리 한 잔씩을 했던 터라 짧은 생각에 정상에 오면 기념하고 싶어 위스키 조그마한 걸 들고 오긴 했지만 마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올라와서 끝난 것이 아니라, 아무 일 없이 잘 내려가야 끝나는 여행이 아닌가. 고산에서 술은 쥐약과도 같다. 어리석게 들고 온 술병 무게만큼 산행은 더 힘들어야 했고, 그 술은 포카라에 도착하면 맛보기로 했다.

따듯한 핫 초코와 감동의 사과에 힘입어 이젠 돌아가는 일정이다. 라잔에게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Thank you라는 말로는 너무 부족한 것 같거든. 나이는 한참 어리지만 산에 대한 전문성에 있어서는 경의를 표한다.


정말 힘들게 온 곳인데, 이렇게 미련 없이 쉽게 내려가야 한다니 한편 아쉽고, 한편 빨리 벗어나고 싶다.

돌아가는 코스는 촘롱에서 지누난다 쪽으로 내려간다. 지누난다에 있는 노천온천에 가려면 오늘은 뱀부나 시누와 까지 내려가야 한다. 뱀부까지는 7시간, 시누와 까지는 9시간. 돌아가는 길이라고 내리막 길만 있는 건 아니다. 물론 내려가는 길이 더 많기는 하지만, 역시 산과 산이 연결된 곳이라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해야 한다. 

어차피 가야 할 길, 미련 없이 떠나기로 한다. 

그래도 자꾸 뒤돌아 봐지는 ABC.

다시 볼 수 있을까?

이 허허벌판에 있는 이 표지판도 올라갈 땐 보이지가 않았다. 확실하진 않지만 살짝 고산 증상이 있긴 했나 보다. 고산 증상이 생긴 사람들 얘길 들어보면 카메라를 손에 들고 계속 찾아다니기도 한다고 하고, 이쪽으로 오라고 하면 알았다고 얘기하고 딴 곳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저 강렬한 햇살, 눈에 반사되는 빛까지 받으면 얼굴은 생각하는 그 모습처럼 된다. 

하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새가 있기 어려운 고도인데 뭔가 날라 오는 게 보인다. 눈을 의심하는 순간, 저건 페러글라이더?

ABC 부근을 돌며 비행을 하더니 사람들이 몰려 있는 쪽으로 착지를 한다.

어디서부터 날라 온 것일까? 저 장비를 메고 안나푸르나 정상에 가서 내려온 게 아니라면 비행기에서 낙하한 것이 틀림없다. 일반 체험 스카이다이빙을 할 때 정말 높이 올라가 60초 자유강하를 할 때 높이가 4500m 정도다. 이곳 높이가 4200m니까 산 정상 높이쯤에서 낙하하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 본다. 

지나가면서 물어보니 러시아에서 왔다고 했다. 더 자세한 걸 물어보고 싶었으나, 당장 페러글라이드부터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라 물어보기를 그만두었다. 세상에 나와 보면 늘 상상 이상이 있었다. 용기 내서 혼자 뭘 해도, 와서 보면 연습게임 같은 느낌이 들곤 하거든. 뛰는 놈 위에 늘 나는 놈이 있다.

올라갈 땐 정말 힘든 코스였는데, 한 시간 반 만에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를 지나간다. 

이렇게 높이 올라와도 하늘은 높기 그지없구나.

눈 앞에 있는대도 실감이 잘 안나는 풍경. 마치 영화 속 원정대가 된 기분

ABC 트래킹 코스는 아주 험한 코스는 아니지만, 종종 사고가 나긴 한다. 대체로는 사진을 찍거나, 한눈을 팔다가 자신의 부주의로 일어나는 경우들이다. 산 저 높은 곳에서부터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살이 정말 빠르다.

물에 빠지면 살아 나오기 힘들다는.... 

발걸음을 재촉해 돌아오는 길이지만 자꾸만 뒤가 돌아봐진다. 다우 렐리를 지나왔다.

대나무가 나타난 걸 보니 뱀부까지 도착. 옆엔 구름이 두둥실. 정말 내려오는 길은 순식간이구나. 2000m가량을 내려오는데 고작 7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오후 5시 무렵, 9시간을 걸어 도착한 시누와 로지. 세수도 못한 지 3일째.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핫 샤워를 할 수 있었다는. 게다가 이곳에선 신라면까지 먹는 호사를 누렸다. 로지 사장님의 셋째 아들이라는데 눈 위에 밴드를 붙이고 까불 까불 장난을 친다. 그러는 와중에 테이블도 닦고, 음식도 날라다 주고. 이들에게 가족은 생활공동체다. 아이를 보니 다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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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오르고 내리는 히말라야 같은 것이다 by 바람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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