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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큐리 Feb 12. 2022

책;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문학동네, 2020.06.05 1판 1쇄, 2021.03.03 1판 19쇄


이 대목에서 나는 나의 빈곤한 상상력에 혀를 찼다.


p102

"나 결심했어. 할머니 제사상에 완벽한 무지개 사진을 가져갈 거야."

"뭐?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하는 거야?"

지수의 결정에 우윤은 깔깔 웃었지만, 속으로 자신도 결정했다. 완벽하게 파도를 탈 거야. 그 파도의 거품을 가져갈 거야.


10년 만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심시선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인 가족들. 세 딸과 아들, 사위와 며느리, 그들의 손자 혹은 손녀. 이들이 찾아간 곳은 무려 하와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9시간을 건너간 것이다. 그곳에서 이들은 제사상에 올릴 특별한 것을 찾는 자신만의 여행을 시작한다.

나는 그들이 준비하는 특별한 것들이 궁금하지 않았고, 사실 소설의 완독 여부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다 이 대목, '파도의 거품'을 가져가기로 한 우윤의 결심에서 나도 모르게 허리를 세우고 책을 고쳐 잡았다. 등을 의자에 한껏 기댄 채로(어쩌면 실눈을 뜨고 있었을지도) 느슨하게 책을 손에 얹고 있던 나는 자세를 바로 잡고 독서대 위해 책을 얹었다. 어쩌면 이 책, 얼마 걸리지 않아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들 것 같다.


그리고, 경아(심시선이 재혼하여 얻은 넷째 딸)는 커피를 준비한다.


p123

경아는 오래전에 식어버린 커피와, 오래전에 끝난 대화를 하와이에서 곱씹었다. 만약에 경아가 완벽한 코나 원두를 사서 엄마가 좋아하던 묵직한 미국식 머그에 내려 제사상에 올리면 죽고 없는 사람이라도 웃을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만의 유머였으니까. 엄마, 그때 말했던 그 코나 원두야, 하고 죽고 없는 사람을 웃게 하고 싶었다. 

 

첫째 딸 이명혜는 훌라를, 둘째 딸 심명은은 화산에 안착한 레후아 꽃의 씨앗을 준비한다. 염산테러의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큰손녀 화수는 프로퍼 익스프레션의 사장님을 직접 모셔서 팬케이크를 준비한다. 지수는 무지개 사진을, 우윤은 파도타기에 성공하며 가장 높은 파도의 거품을 물병에 담아온다.


이 정도면 되었다. 설명하고자 열거한 것이 아니니 더 열거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사실 한 가족이라고 믿기 어려운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경험은 흔하지 않다. 귀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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