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백화점이자 19세기 당시 "쇼핑의 성전"으로 불린 <봉 마르셰>를 창업한 사람은 부시코(Aristide Boucicaut, 1810~1877)이다.
부시코, 마르그리트 부부
그는 노르망디의 시골 마을에서 모자 가게의 아들로 나고 자랐다. 기계를 통한 혁명이 지구를 뜨겁게 달구던 시절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가 보여준 세계보다 훨씬 큰 세상을 갈망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산업 철도 노선이 완공된 1년 후인 1828년, 18세의 부시코는 고향 노르망디를 떠나 파리로 올라온다.
대도시 파리를 향해 가는 길, 청년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까? 세계 최초의 백화점을 창업하는 자로서 역사에 남을 행보는 무려 40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었다.
누구나 그렇듯 하나하나의 선택과 결정이 쌓여 운명이 되게 마련이다.
부시코의 운명은 고향을 떠난다는 결정부터 시작되었다. 과감한 선택이 결과를 즉시 만들어낸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준비되지 않은 선택은 무모한 결정이 되고 만다. 부시코는 파리로 올라온 지 무려 24년이나 지나서야 봉 마르셰를 인수할 수 있었고, 다시 17년이 지나서야 현대적 의미의 백화점을 세울 수 있었다.
시골에서 상경한 청년 부시코는 당시에 성행한 마가쟁 드 누보테(magasins de nouveautés)에 점원으로 취업한다. 상점의 이름은 ‘프티 생토마(Au petit St. Thomas)’였다.
당시 대부분의 개인 상점에서는 연고나 지연을 찾아 온 소년 소녀들에게 최소한의 숙식만 제공하면서 일을 시키는 도제식 고용살이가 관행이었다. 부시코의 상인 정신은 대부분 이곳에서 쌓은 직업 수련이 뿌리를 이루었다. 상업으로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붙든 채 고통을 견뎌냈다.
꿈은 아름답지만 꿈을 놓지 못해 견디는 시간은 비참하게 마련이다. 당시 부시코가 경험한 직업 수련, 곧 점원 생활은 혹독했다. 급료를 대신하는 숙식해결이란 보잘것없는 빵 조각과 영업 마감 후 매장 바닥에서 웅크려 자는 새우잠이었다.
젊은 부시코는 올리버 트위스트(찰스 디킨스, 1837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수 만 명의 올리버가 유럽 전역에서 굶어 죽어가던 시대였으며 런던처럼 파리의 슬럼가에도 빈민들이 가득하던 때였다. 부시코는 귀족생활을 선망하는 부르주아들에게 유행하는 옷감과 레이스로 장식한 모자, 실크 부채 등의 소품을 팔면서도 스스로는 빈민의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부시코는 초기에 경험한 혹독한 점원 생활을 끝내 잊지 못했다.
40년 후인 1869년 9월 9일, 봉 마르셰 신관 즉, 현대적 의미의 백화점이자 세계 최초 백화점의 초석을 놓으면서 부시코는 박애주의를 강조한 선서문을 작성하여 주춧돌 밑에 묻었다.
여기에 건립되는 이 특별한 건물에, 우리는 박애주의에 바탕을 둔 조직을 세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노력에 항상 성공이라는 관을 씌워 보답해주시는 신께 감사드릴 수 있기를 바라왔습니다. 우리가 동포에게 봉사하는 마음으로 임하기만 한다면 이 조직에 의해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백화점의 탄생 _ p172)
부시코는 오랫 동안 간직한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적어 주춧돌에 묻은 뒤, 본격적인 "쇼핑의 성전"을 지어올리게 된다. 파리로 상경한 해인 1828년으로부터 40년이 지나서야 진정한 의미에서 백화점의 첫 걸음이 시작된 셈이다.
건축가로 명망높았던 루이 샤를 부와로가 설계한 봉 마르셰 신관은 1869년 주춧돌을 놓았으며, 1872년에 공사를 완료했다. 곧이어 귀스타브 에펠(에펠탑의 바로 그 에펠)이 맡은 2기 공사는 1887년이 되어서야 완공된다. (부시코는 1877년 사망)
1기 공사로 세워진 봉 마르셰 신관은 5천㎡의 부지 위에 2만 5천㎡ (7,562평)의 영업면적을 확보했으며, 4개 층에 30여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상품별 매장을 운영했다. 직원 수는 약 3천 명이었다. (36명의 매장 책임자와 2,500여명의 매장 판매직에 더해 관리, 계산원, 식당 조리사, 하역, 청소, 상주 소방관, 145필의 말과 화려한 마차를 운영한 운송팀 등 전체 직원 수)
신관 건축 전에도 1년에 2,000만 프랑의 매출을 올리던 봉 마르셰는 신관 건축 후 1억 프랑 매출의 거대한 상점이 된다. 이 정도의 대형 건물이 오직 쇼핑만을 목적으로 건축된 것은 역사상 최초였다. 바야흐로 백화점의 시대를 연 것이다.
부시코의 봉 마르셰, ‘백화점’이라는 상점의 특징을 설명하는데 있어 ‘공간’은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수평으로 점점이 흩어져있는 소매점들을 한 곳으로 모았으며, 모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건물로 수직 계열화하여 직영하는 것이야말로 백화점의 본질을 규정한다.
봉 마르셰 이전의 쇼퍼(Shopper)들은 거리에 자리잡은 ‘눈높이’의 상점들을 거닐며 쇼핑했다. 봉 마르셰 신관 건축 이후, 사람들은 아득히 높은 천장을 시야에 둔 채로 층을 옮겨 가며 쇼핑을 하게 되었다. 매장이 수평에서 수직으로 공간이동을 한 셈이다. 거대한 건물의 위용에 압도된 채로 입구에 들어서면 다시 한번 까마득한 높이에 시선을 빼앗기고, 층층이 자리잡은 화려한 상품들에 넋을 놓아버리도록 설계한 것이 바로 부시코가 의도한 쇼핑의 성전, 백화점이었다.
백화점의 공간 혁신 이후 100여 년이 지나서야 공간의 혁신이 다시 나타난다. 가상 공간, 인터넷이다. 무엇이든 되지만, 무엇도 아닌 무한 공간은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세상 그 너머이기도 하다.
수직으로 높이 올라간 건물에서 유리의 기능은 특별했다. 부시코가 철을 이용한 건축에 집착한 것은 철골을 쓰면 천장을 유리로 한 광대한 홀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리로 된 천장을 통과한 빛이 매장 곳곳에 설치된 전기 조명과 어울려 마치 ‘꿈속의 궁전’을 실현한 듯 했다.
궁전을 완성하듯 내부의 각 공간에도 공을 들였다. 벨벳으로 쿠션을 두른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카페테리아, 독서실, 화랑 등 상류층의 교양을 구현한 공간을 갖추었다.
부시코는 또한 매장을 미로와 같이 배치했다. 미로였지만 가는 곳마다 상품의 꽃들로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처럼 꾸몄다. 진열과 전시는 방문객이 상품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도록 만드는 장치였다. 구경꾼에서 구매자로 바뀌는 순간은 강렬한 인상을 주어야 했다. 봉 마르셰의 상품 전시와 진열은 예술적이고 파격적이었다.
봉 마르셰가 선도한 공간의 혁신은 이후 백화점들의 건축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루브르백화점은 1890년 백화점과 가도를 직접 연결하는 지하도를 뚫은 뒤 지하의 답답함을 없애기 위해 지하도와 지하층 전체를 ‘살롱 루미에르’ 즉 빛의 살롱으로 꾸몄다.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전기 조명이 등장했고 거울, 크리스털, 화려한 직물로 전체를 치장해 마치 인도의 왕궁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백화점들은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가장 먼저 도입한 최신의 건물이기도 했다. 1852년 최초로 발명된 오티스의 엘리베이터는 1857년 뉴욕의 E.V. 호그와트 백화점 5층 건물에 최초로 설치된 이후 대형 백화점의 건축에서 빠질 수 없는 설비가 되었다. 엘리베이터뿐 아니라 에스컬레이터도 백화점이 선점했다. 최초로 백화점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한 곳은 영국의 해롯 백화점으로 1898년이었다. W. 레노가 처음으로 에스컬레이터를 발명한 것이 1891년이고, 개량형이 등장한 것이 1890년대 후반이므로 해롯의 에스컬레이터 도입은 센세이션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화신백화점이 화재로 건물이 모두 타버린 후 지하 1층, 지상 6층 규모의 당시 최고층인 새 건물을 지어 올리면서 엘리베이터 4기와 에스컬레이터 2기를 설치한 것이 최초이다. 1937년의 일이다.
백화점이 공간의 혁신을 통해 쇼핑의 성전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부시코의 40년이 웅변하듯 결코 쉬운 경로가 아니었다.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 하에서 소매업은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으며, 왕정복고기(1814~1830)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상점의 형태는 부티끄(Boutique)였다. 이러한 상점은 구매자가 자유롭게 방문하여 둘러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소비’, ‘소비자’라는 개념이 만들어지기 전이었으며, 판매자가 주도권을 행사했다. 반드시 구매할 것이 아니라면 상점을 방문하지 못했으며, 들어가서도 판매자가 제시하기 전까지는 가격 정보를 알 수 없었다. 이른바 아이쇼핑(eye shopping)의 개념은 1830년대 이후가 되어서야 생겨나게 된다.
생산자, 판매자, 소비자의 역학 관계를 변화시킨 것은 역시 한 세기 전의 산업혁명이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의 혁신과 이에 수반하여 일어난 사회, 경제 구조 상의 혁신을 산업혁명이라고 말한다.
혁명 이후 왕족과 귀족이 지배하던 세계에 이른바 부르주아라고 불리는 중간계급이 나타났으며 상품이라고 불린 만한 것이 생산, 공급되면서 비로소 ‘소비자’라는 개념이 출현한다. 생산에서 소비로,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 문화 그 자체의 체계가 전환하는 시대가 19세기였다.
한편 부시코가 출생한 1810년은 황제 나폴레옹의 시대였고 전란이 유럽 전역을 휩쓸던 시기였지만 대항해 시대와 상업혁명이 산업혁명을 낳고, 다시 소비혁명으로 이어지는 도도한 흐름은 끊김 없이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혁명, 혁신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만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던 바로 그 시대에 유행하는 상품을 통해 소비자를 끌어들이려는 마가쟁들이 파리의 곳곳에 퍼져나간 것이다. 템플 기사단, 귀여운 악마, 예술가의 다락방, 마법의 등불 같은 호기심 충만한 이름의 마가쟁들이 우후 죽순 생겨났으며, 소비자의 이목을 끌기 위한 다양한 상술을 경쟁적으로 내놓았다. 프띠 생토마에서 제공한 아이들을 위한 당나귀 산책이나, 년 중 두 차례의 정기세일이 그러했다. 초기 파사쥬에서 도입한 입점 자유, 정가명시, 현금판매, 반품가능과 같은 판매방식은 한 세대를 거쳐 상점 경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부시코가 1852년 봉 마르셰의 공동 경영을 시작한 때는 이러한 변화가 30년에 걸쳐 진행된 이후였다. 파리 상경 24년 만에 완벽하게 상점 운영의 노하우를 습득한 노련한 상인 부시코는 상점의 주인이 되어 역량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게 된 것이다. 평점원에서 출발하여 상류층 고객들을 상대하는 판매기술이 몸에 밸 정도로 습득했고, 관광객들을 상대하기 위해 독학으로 공부한 영어를 능란하게 구사하기도 했다. 매장 책임자(프르미에)로서 상품의 구매를 책임지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으니, 경영자로서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1852년은 또한 프랑스 역사에서 제2제정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해이다. 1851년 12월 쿠데타에 성공한 루이 나폴레옹은 국민투표를 실시해 압도적 다수의 찬성을 얻었고, 이듬해인 1852년 12월에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여 제2제정을 시작한다.
부시코 부부는 그간 쌓은 경험을 최대한 발휘하여 봉 마르셰의 매출 규모를 11년 만에 20배에 가까운 700만 프랑으로 성장시킨다. 그리고 그 해, 1863년 부시코는 공동 경영자인 쥐스탱 비도의 지분을 사들여 명실 공히 봉 마르셰의 유일한 소유주가 된다.
완전한 경영권을 확보한 부시코는 6년 뒤인 1869년, 드디어 상점의 수정궁 건설에 착수한다. 때마침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 남작의 파리개조계획에 따라 프티 메나쥬 시립 의료원이 헐리면서 광대한 부지가 나오게 된다. 부시코는 이 부지를 일괄 매입해 바크가(街), 세브르가, 벨포르가, 바빌론가로 사방이 둘러싸인 5천㎡의 구획에 거대한 점포를 세우기로 한 것이다.
1기 공사를 완료한 뒤 넘쳐나는 쇼퍼들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부시코는 더욱 큰 규모의 신관 2기 공사를 에펠에게 의뢰한다. 쇠와 유리를 기능적으로 사용한 새로운 건축양식을 도입하는 것인데, 철골을 쓰면 천장을 유리로 한 광대한 홀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털 홀을 전면에 내세운 설계도에 따라 구현된 내부의 모습은 ‘폐쇄된 공간의 호사스러운 개방성’(백화점의 문화사, 김인호)으로 표현되었다.
파리 중심의 4개 대로에 둘러싸인 거대한 성당을 닮은 압도적 위용의 건물, 내부에 들어서자 마자 마주치게 되는 광대한 크리스털 홀을 상상해보자. 조선의 서울에서 남대문과 경복궁을 가로막고 꽉 차게 들어선 거대한 미츠코시 백화점이 조선인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160년 전 파리 시민들에게도 거대한 봉 마르셰는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당시에 이러한 광경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세계 박람회뿐이었다. 센 강의 시테섬에 자리한 노트르담 대성당이 주는 경건하면서도 압도적인 스카이라인에 익숙한 파리시민들이었으니 단순히 거대한 규모에 경이로움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쇼핑의 성전은 뭔가 은밀하지만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파 화가들의 화려한 색채와 비슷했다. 파리의 시민들은 봉 마르셰의 유혹에 빠져들었다.
봉 마르셰는 오직 쇼핑만을 위한 건물이었으며, 쇼핑은 종교나 예술보다 강렬했다.
봉 마르셰는 누구나 자유롭게 입점하여, 관람하듯 쇼핑을 즐길 수 있었다. 시어스가 말년에 거대한 시어스 타워를 세운 것은 그저 어깨에 힘주고 거들먹거리는 정도였지만, 부시코의 신관 대공사에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
수정궁처럼 충격과 경이를 선사하여 파리 시민을 모조리 끌어들이겠다는 목표였다.
일제 치하의 조선처럼 시민들이 구매력을 전혀 갖지 못한 상태였다면 실패할 계획이었지만 당시의 파리는 자본주의로 포장한 제국주의를 통해 세계의 자본이 몰려들던 유럽의 심장이었다.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을 선망하는 부르주아들의 욕망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을뿐더러 그러한 부르주아의 생활을 동경한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은 봉 마르셰가 제시하는 상품들로 생활을 치장하기 위해 더욱 열광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멀리서부터 스카이라인을 꽉 채우며 보이는 봉 마르셰에 홀리듯이 다가들었다. (건물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은)입구부터 북적거리는 인파를 보면 급기야 마음이 조급해졌다. 1년에 단 두 번, 1월과 7월에 열리는 솔드(Soldes)라 불리던 바겐세일과 엑스포지옹(Exposition)이라고 불리던 특별 세일에는 점 찍어둔 물건을 사지 못할까 싶은 마음에 더욱 급하게 서두르게 되었다. 인파를 헤치고 입구를 통과하자 천장 가득 완전히 개방된 크리스털 홀을 마주하면 아예 넋을 놓게 된다.
봉 마르셰를 모델로 한 에밀 졸라의 소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에서 주인공이자 백화점 사장인 옥타브 무레가 말한다.
“중요한 건 손님들을 가게로 끌어들여 욕망에 불을 붙이는 것이라고”
그로부터 160여 년, 소매업에 등장한 거의 대부분의 상점은 <봉 마르셰>가 고안한 상점의 근본_Origin에 기초하여 설계되었으며 소비자의 욕망과 욕구를 가장 중요한 타겟으로 설정하여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