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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큐리 Aug 24. 2020

봄, <프랭땅>

쥘 잘뤼조, Since 1865

▶ 프랑스어로 ‘봄에’라는 뜻을 가진 백화점

▶ 매년 입춘(3월 21일), 봄의 첫날 방문한 모든 고객들에게 보라빛의 제비꽃다발을 선사하는 백화점(1870~)

▶ 두 번이나 화재로 무너졌지만, 이름처럼 곧바로 재생한 백화점

▶ 전기 조명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백화점

▶ 지하철과 매장을 직접 연결한 최초의 백화점

▶ IGDS_글로벌 백화점 협회가 2016~2018년, 3개년 연속 세계 최고 백화점으로 선정한 백화점


1865년 쥘 잘뤼조(Jules Jaluzot_1834~1916) 가 창업한 백화점, 프랭땅에 대한 이야기이다.


history-of-printemps-haussmann / 출처 : Come to Paris


파리 9구 오스만 대로(Boulevard Haussmann), 생 라자르 역 인근에 입지를 두고 있다. 바로 옆에는 파리 최고 백화점 자리를 놓고 다투는 갤러리 라파이예트(Galeries Lafayette_1893년 개점)가 자리하고 있다.


창업자 쥘 잘뤼조(Jules Jaluzot_1834~1916)

그는 봉 마르셰의 직원이었는데 매장에 손님으로 온 여배우를 만나면서 새로운 인생을 열게 된다.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 Française)의 유명 배우였던 오귀스틴 피작(Augustine Figeac_1821~1883)과 1864년 결혼한 뒤 오귀스틴이 30만 프랑의 자본금을 제공하면서 프랭땅 백화점의 역사가 시작된다. 열 세 살 연상의 여배우는 유명세만큼이나 관계, 재계와 금융권에 걸친 인맥도 화려했다.

서른 살의 청년은 패기 만만했으며, 당대 최고의 백화점 봉 마르셰의 실크 매장에서 경험을 쌓아 수석 구매상 프르미에(Premier)의 자리에 오른 이였다.

1865년, 문을 연 프랭땅의 영업은 성공적이었다. 2개월 반을 기준으로 한 파격적인 가격의 재고 처분 세일이 호응을 얻었으며 특히 ‘마리 블랑쉬_Marie Blanche’라는 이름의 옷감이 파리 시민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냈다. 1870년에 발매된 이 옷감은 쥘 잘뤼조가 프랑스 견직물 생산의 중심지였던 리옹에서 주문 제작하여 도입했는데 ‘하얀 마리’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희미한 광택이 도는 검정색의 실크였다.

그러나 시련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뛰어난 머천다이징을 기반으로 승승장구하며 1874년에는 대대적인 확장을 진행하기도 했지만, 7년 후인 1881년, 한창 봄이 시작되던 3월의 어느 날, 봄이라는 뜻의 프랭땅에 대화재가 찾아온다. 건물이 거의 무너질 정도의 큰 화재였다.

모든 것이 사라졌지만, 이것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은 것은 역시 경영자인 쥘 잘뤼조였다. 새벽에 치솟은 불길 속에서도 200여 명의 직원들을 탈출시킨 사장 쥘 잘뤼조의 영웅담이 화제가 된 것이다. 다시금 자본이 모여들었고 대중의 여론도 매우 호의적이어서 불과 1년 만에 건물을 다시 지어 올리면서 재기한다. 내외부가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졌다.

https://www.groupe-printemps.com/en/history



파리 시민들에게는 당시 가장 유명한 건축가와 예술가가 참여한 백화점의 재건축이 신선한 화제가 되었다. 화마에 사라진 건물이, 프랭땅이 의미하는 ‘봄’을 상징하듯 꿋꿋하게 재건되는 모습은 세기말 사람들에게는 오랜만에 만나는 희망적인 뉴스가 아니었을까?

건축은 폴 세딜(Paul Sédille, 1836-1900)이 맡았는데, 철과 유리가 골조를 이루며 엘리베이터를 가동하는 최첨단의 건물이었다. 철과 유리는 1871년 부시코의 봉 마르셰가 에펠에 의뢰한 2기 신축 공사에서 적용한 방식이기도 했다. 프랭땅 백화점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정면 상층 조각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 알려진 앙리 샤퓌(Henri Chapu, 1833~1891)의 작품이다.

쥘이 특히 강조한 것은 조명이었다. 에디슨이 전구를 최초로 소개한 지 3년 만에 전기 조명을 본격적으로 적용한 최초의 백화점이 되었다. 112개의 백열 전구와 160개의 아크 램프가 설치되었다. 프랭땅은 이러한 ‘공간의 혁신’을 계속 추진해나갔다. 프랑스에 최초의 지하철이 도입된 지 4년 후인 1904년에는 지하철과 매장이 직접 연결되는 최초의 백화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봄은 늘 짧다.


쥘 잘뤼조의 만년은 비 온 뒤 흙 바닥에 떨어진 꽃잎처럼 처연했다. 한바탕 소나기에 벚꽃이 후두두 떨어지듯, 향기는 여전히 남아있으나 그마저 조만간 사라질 터였다. 봉 마르셰의 입구에 여전히 창업자 부시코의 이름이 남아있는 반면, 프랭땅은 창업자를 기리는데 조심스러워한다. 쥘은 정치에 뛰어들어 시장에 당선되기도 했는데 설탕 정제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가격 조작 사건으로 인해 모든 명예를 잃게 된다. 프랭땅에서도 횡령 사건으로 인해 1905년 백화점 사장에서 퇴임했다. 1914년 전쟁이 발발하고, 아들이 전투 중 사망했다. 쥘은 1916년 세상을 떴다.


창업자가 불명예 퇴진하고, 전쟁과 화마에 시달리면서도 프랭땅은 높은 파도를 넘어갈 때마다 한층 성장하곤 했다. 하지만 매각과 인수가 여러 차례 거듭되면서 백화점이 발명된 19세기의 역사성은 퇴색했다. 현대의 프랭땅(Le Printemps)은 파리 본점을 비롯한 16개의 지점에 4,00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카타르 투자 펀드가 소유하고 있다. 역사성은 퇴색했으나, 여전히 매출 규모뿐 아니라 소비자의 평판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백화점으로 꼽힌다. (IGDS_글로벌 백화점 협회의 2016~2018년, 3개년 연속 세계 최고 백화점으로 선정)


쥘 잘뤼조 이후, 프랭땅의 새로운 경영자로 나선 이는 귀스타브 라기오니(Gustave Laguionie)였다. 그는 건축가 르네 비네(Rene Binet)에게 의뢰하여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을 기반으로 한 대규모의 확장 보수 공사를 진행하여 매장을 더욱 확장했다. 그런데 화마가 또 한번 프랭땅을 덮친다. 1921년이었다. 아들 피에르 라기오니(Pierre Laguionie)가 경영권을 승계하자마자 1년 만에 발생한 화재였다. 백화점은 다시 무너졌지만 곧 재건되었다. 두 번째의 재건축에서 프랭땅의 새로운 아이콘인 스테인드 글라스 돔이 설치되었다. 30미터 높이의 중앙 아트리움은 천장을 통과하며 분화된 다양한 채색으로 물들었다. 봄의 꽃밭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아름답고 화려한 둥근 채색유리 천장은 2차 대전 당시 폭격을 피하기 위해 분해되어 따로 보관되기도 했다. (백화점 정면의 앙리 사퓌가 만든 사계 조각과 1923년의 스테인드 글라스 돔은 1975년에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라기오니는 1931년에는 슈퍼마켓 체인 프리즈닉(Prisunic)을 열기도 했다. 프랭땅과 프리즈닉의 조합은 1970년까지는 명맥을 유지했으나 석유 파동을 견디지 못했다. 1970년대 초 스위스 기입인 마우스 프레 그룹(Maus Frères Group_라코스테, AIGLE 등의 브랜드를 소유한 패션 그룹)이 인수했다. 이들은 프랭땅을 해외로 확장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일본 긴자점을 비롯하여 이스탄불, 두바이, 싱가포르, 쿠알라룸푸르에도 지점이 설치되었다. 1988년의 한국 지점도 같은 맥락이다. 글로벌 전략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1991년 프랑소와 피노(François Pinault)가 인수한다. 피노는 프랭땅을 인수하면서 그룹의 이름도 PPR 그룹(Pinaud-Printemps-Redoute)으로 바꾼다. 이 때의 Le Printemps는 패션, 액세서리 및 특히 남성복에 중점을 두면서 성장했다. 프랭땅은 1930년에 백화점 최초로 남성을 위한 고급 기성복(프레타 포르테_Pret-a-porter)인 브루멜(Brummell_댄디의 대명사)을 판매한 바 있다. 또한 2017년 CEO인 Paolo de Cesare의 인터뷰기사에 따르면 프랭땅 본점 패션 매출의 45%가 남성을 위한 프레타 포르테이다. 39)

https://www.groupe-printemps.com/en/history


PPR그룹은 이후 구찌를 인수하면서 세계 3대 명품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PPR그룹과 언제나 함께할 듯 보였지만, 피노는 2006년 프랭땅을 이탈리아의 보를레티(Borletti) 가문과 도이체 방크(Deutsche Bank)에 매각한다. 보를레티 30%, 나머지 70%의 지분은 도이체 방크에 매각했는데 1984년에 봉 마르셰를 인수하여 여전히 경영하고 있는 명품 업계의 경쟁자 LVMH와는 다른 행보였다. PPR그룹은 2013년 사명을 케링(Kering)으로 변경했다.


1917년 이래 백화점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보를레티가 경영권을 넘겨 받으면서 프랭땅은 세계적인 백화점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된다. 이탈리아의 리나센테(La Rinascente) 백화점을 소유한 보를레티(Borletti)는 수 십 년 간 정체되어 있던 프랭땅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었다. 2009년 8,000만 프랑을 투입하여 파리 오스만 본점의 대규모 리노베이션을 진행했으며 명품 브랜드를 앞세워 중국, 일본, 한국, 러시아, 브라질 등 해외에서 온 관광객을 중점적으로 공략했다. 19세기 백화점 발명기에 부시코와 쥘 잘뤼조가 부지런히 카탈로그를 배포하며 끌어들이고자 노력했던 파리 관광객들은 세기가 지나서도 여전히 파리에 열광하고 있으니 적절한 전략이라 할 수 있었다.

보를레티와 도이체 방크는 성공한 전략의 열매를 7년 만에 수확할 수 있었다. 2013년, 카타르 투자펀드(Divine Investments SA (DiSA))에게 프랭땅의 지분 전체를 매각한 것이다. 2013년은 포브스에서 발표하는 글로벌 2000 중 프랭땅이 3년 연속 세계 백화점 1위를 차지한 해였다. 2006년 PPR로부터 11억 유로에 인수하여 2013년 매각 대금으로는 17.5억 유로를 받았다. 2015년 프랭땅은 창립 150주년을 맞았다.


오늘날, 프랭땅 본점(Printemps Haussmann)은 Printemps de la Mode(패션), Printemps de la Beauté et de la Maison(뷰티_2017년 7월 개관), Printemps de l' Homme(남성패션)의 세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창업 당시에 쥘 잘뤼조가 시행한 봄꽃 행사는 경영자와 소유자가 바뀌어도 계속되고 있다. 프랑스어로 ‘봄에’라는 뜻을 가진 프랭땅은 매년 입춘(3월 21일), 방문한 모든 고객들에게 보라빛의 제비꽃다발을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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