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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Nov 14. 2019

아직도 여의도는 싫다.

죽음은 그렇게 아무런 예고 없이 불친절하게 찾아온다.

 아빠가 입원한 것은 7월 말이었다. 오랫동안 소화가 잘 안되고 허리가 아프다는 말씀을 해왔었다. 종합검진 같은 것은 받지 않는 성품이었다. 처방전이 없어도 약을 짓던 시절부터 동네의 친한 약사 분과 의논해서 스스로의 병을 진단하고 판단하며 약을 먹고 평생을 살아온 분이었다. 의사인 오빠도 그저 디스크인 줄 알았다. 아빠가 자꾸 살이 빠지는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었다.


 아빠가 입원하기 몇 달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엄마는 7년간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 병수발을 했었다. 긴 간병 생활에 몸이 약해진 엄마는 아빠의 건강까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우리 모두 그랬다. 나는 첫 아이를 임신해 만삭의 몸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었고, 오빠는 뒤늦게 레지던트 과정을 끝내고 병원에서 의사로서 자리 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언니도 아직 어린 두 아이를 오빠 없이 혼자 키우다시피 했고, 우리 가족 모두 몸도 마음도 바쁜 시절이었다.


 암이라는 게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자라기도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췌장암이란 그런 암이었다. 수술로 손을 쓸 수 있는 시기는 한참 지났다고 했다. 아빠는 이제 마약 성분이 들어간 진통제가 링거 속에 들어가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당신 몸도 힘이 들었을 텐데, 만삭인 딸이 병원에 들락거리는 게 안쓰러웠는지, 아빠는 내가 집에 갈 때마다 자꾸 1층까지 링거 병이 걸린 스탠드를 끌고 내려오려 하셨다. 우리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은 줄 알고 있었다. 엄마는 다시 장기적인 간병생활을 할 것을 대비해서 잠만큼은 집에서 주무시고 오기로 했다. 그래서 아빠는 그날 밤도 혼자 병원에서 밤을 보내셨다.


 좀 더 일찍 병원에 갔다면 달라졌을까.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우리 가족은 모두 일찌감치 교회에 다녀와 아빠 병원으로 출발했다. 여의도 성모병원은 우리 집에서 40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엄마와 내가 병원에 도착하니 아빠는 밤사이 많이 핼쑥해져 있었다. 어젯밤에 많이 힘들어하셨다고 옆자리 아저씨가 말씀하셨다. 우릴 보자마자 화장실에 가셔야겠다고 했다. 내가 링거병을 들어드리자 병실 밖으로 몇 발짝 발걸음을 떼던 아빠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일요일 아침, 그 병원에 있던 모든 내과 당직의사가 아빠의 침대 앞으로 모였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전기충격기가 아빠의 몸을 들썩이게 했다. 내 전화를 받고 오빠가 급히 병원에 도착했다. 그 병원에 근무했던 의사인 오빠가 나타나자, 후배 의사들은 쉬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계속했다고 한다. 차마 선배의 아버님의 사망 소식을 쉽사리 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제 그만 하라는 오빠의 말에 심폐소생술은 멈췄고, 오빠는 가족들에게 아빠는 이제 먼 곳으로 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은 지 열흘만의 일이었다.


 그때 배 속에 있던 아이는 이제 아홉 살이 되었다. 많은 일이 우리 가족을 스쳐 지나갔다. 오빠와 나는 아이를 하나씩 더 나았고, 엄마는 그 사이 갑상선 암수술을 하고 회복하셨다. 외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는 우리 아이들은 아빠의 기일마다 사진으로 외할아버지를 만났다. 


  기억이란 참 이상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겪었던 힘겨운 시간들, 특히 1년 정도의 시간들은 모두 어디론가 휘발되어 버렸다. 어떻게 장례를 치르고, 어떻게 아이를 낳았는지, 엄마와 내가 그 시간들을 어떻게 견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날 아침의 일은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편의점에 들러서 샀던 라면의 이름과, 입었던 임신복의 디자인, 아빠의 빈소가 마련되기 전 대기하던 일요일 여의도 성모병원의 1층 로비의 모습, 그때 텔레비전에서 나왔던 드라마의 제목까지도.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포함해 모두 다 사진처럼 내 머릿속에 또렷이 박혀있다. 마치 기억이 박제된 것처럼. 그 날 이후 내 안의 어떤 시계 하나가 멈춰버렸다.


  며칠 있으면 또다시 아빠의 기일이다. 그 사이 8년이 지났다. 이제는 가족이 모여도 눈물바다가 되지는 않는다. 담소를 나누고 웃기도 한다. 그러다 나온 눈물 한 방울을 서로가 모르게 손수건에 찍어내기도 한다. ‘부재’라는 것은 결국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세수를 하다가, 하늘을 보다가 갑자기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일도 2,3년이 지나자 멈추게 되었다. 하지만, 가슴에 뚫린 구멍까지 메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 공백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가족을 잃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해마다 봄에 벚꽃이 예쁘게 피고, 가을에 불꽃놀이 축제를 해도 아직은 여의도에 마음 편하게 놀러 가지 못한다. 아빠가 갑자기 떠나버린 공간은 나에겐 여전히 야속한 장소로 남아있다. 언젠가는 그런 마음마저도 무뎌질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여의도는 아무 잘못이 없지만, 그래도 나는 여의도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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