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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Jul 09. 2020

댁의 책상 밑은 안녕하십니까?

닦아도 닦아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흔적들


 두 녀석 다 학교에 가지 않는 평일이다. 큰 아이 봄이의 온라인 아침 조회가 있는 오전 8시 45분에 맞추어 겨우 눈을 떴다. 봄이는 오늘 오전 4교시 동안 실시간 온라인 수업이다. 화상회의처럼 선생님과 직접 수업을 한다. 급히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화면에 보이는 윗도리만 내복에서 티셔츠로 갈아 입혔다.

 아침부터 피곤하다. 특수학교에 다니는 둘째 별이는 온라인 수업이 간단하다. 동영상 몇 개를 보고 학습지만 풀면 된다. 실시간이 아니다. 좀 더 늦잠을 자는 게 엄마를 도와주는 것이지만, 별이도 어김없이 누나와 같이 일어났다. 아침부터 두 녀석의 민원이 들끓는다.

 "엄마! 프린트가 없어졌어!"
 "엄마! 수학익힘책이 어딨지?"
 "엄마! 나 이 문제 못 풀겠어 엉엉엉."
선생님과 연결된 마이크를 잠시 끄고 봄이는 연신 엄마를 불러댄다.

 "엄마! 요플레!(먹고 싶어요)"
 "엄마! 쉬!(하고 싶어요)"
 "엄마! 빨간 버스!(그려 주세요)"
별이도 지지 않는다.

 어영부영 4교시가 끝났다. 대충 점심도 차려 먹였다. 이제부터 봄이는 오후 2교시 동안 동영상만 보는 수업을 들으면 된다. 점심을 먹고 휴대폰으로 게임을 잠시 하더니 5교시 수업부터는 침대에 누워서 동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자기는 너무 힘들다나 뭐라나.

 별이는 8세나 되었지만 발달이 느린지라 아직도 화장실 뒤처리를 잘 못해서 손이 많이 간다. 정확히 말하면 기저귀를 반만 떼었다. 7세 초에 소변 기저귀는 떼더니 큰 일을 볼 때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자꾸 팬티를 더럽힌다. 하루에 몇 번씩 별이를 감시하고(낌새가 보이면 쫓아다니며 "너!! 화장실로 당장 가!!"라는 멘트를 날린다) 씻기고 하다 보면 오후 시간도 순식간에 지나간다.

 드디어 6교시 끝. 별이와 나를 치료센터에 차로 데려다 주기 위해 친정 엄마가 오시려면 20분이 남았다. 내 차로 갈 수도 있지만, 센터의 주차가 열악해 10분 거리를 엄마가 태워다 주고, 집에 올 때도 데리러 오신다. 엄마가 오기 전의 짧고 귀한 휴식 시간을 누리기 위해 침대에 벌러덩 누워 그간 읽기를 미뤄둔 책을 폈다. 오늘의 첫 휴식이다.
 "아..좋다..!!"
정확히 책 한 장을 읽었을 때였다.
 "엄마!! 큰일 났어!!! "
봄이의 목소리다. 또 뭐냐.
 "내가...지우개 청소기를 떨어뜨렸어!! 책상 밑이 엉망이 됐어!!"
 "..."

 봄이의 말대로 봄이의 책상 밑은 엉망이었다. 책상 위의 지우개 찌꺼기를 청소하는 빨간 무당벌레 모양의 지우개 청소기가 뚜껑이 열린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부러진 연필심과 지우개 찌꺼기들도 온 방안의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무선 청소기로 치우면 끝이겠거니 했다. 나는 소중한 휴식 중이었다고. 하지만 책상 밑 방바닥에 거뭇거뭇한 작은 알갱이가 잔뜩 붙어있어 물티슈로 아무리 닦아도 시꺼먼 때가 나왔다. 물티슈 한 통을 다 쓸 참이다. 뭐가 문제지?

 범인은 금방 색출되었다. 봄이의 의자. 정확히 말하면 올해 초 공부방을 만들어주며 새로 구입한 보랏빛 회전의자에 달린 다섯 개의 바퀴였다. 책상 밑으로 떨어진 지우개 찌꺼기와 부러진 연필심 위로 그 바퀴들 중 하나가 지나가면 시꺼먼 그것들이 뭉쳐 까만 때가 되었는데, 이게 바퀴 5개에 착 달라붙어 바퀴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까만 고무 때를 다닥다닥 바닥에 붙여 자국을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회전의자가 한창 재밌을 나이인 열 살 봄이는 그 시꺼먼 띠가 달라붙은 바퀴를 굴려 온 방안을 누볐다. 봄이의 발바닥이 늘 까맸던 것도 다 이 바퀴 때문이었다.




 유난히 민감하고 스트레스를 잘 받는 성격의 봄이는 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연필심을 뚝뚝 자주 부러뜨렸다. 공책에 구멍이 날 정도로 글씨를 꾹꾹 눌러쓰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글씨를 써도 손가락 마디가 빨개지며 아픔을 호소했다. 소근육 발달이 조금 느린 편이기에 글씨 쓰는 속도는 쉽게 빨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연필심을 부러뜨리는 횟수가 잦아졌다. 글씨 한 두 글자를 채 못쓰고 뚝뚝 부러뜨리길래 달래도 보고 타일러도 보고 꾸짖어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작년 봄, 학원에서 다른 학교 아이들이 봄이를 괴롭혔던 일이 있었는데, 그 무렵 연필심을 부러뜨리는 것도 최고조에 달했다. 봄이의 책상 위와 그 아래 바닥은 부러져나간 연필심으로 가득했다. 봄이의 놀이치료 선생님은 아이의 스트레스로 인해 필압이 높아질 수 있다고 했다. 더는 아이를 나무랄 수 없었다. 아이는 자신이 힘들다는 표현을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 끝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다른 학교 아이들이었음에도 학교 폭력위원회를 열었고 내 성에 차지는 않지만 부모와 아이들의 사과를 받아냈다. 그 이후 2학기가 되어 학교에서 친한 친구도 생기고 마음이 좀 안정되자 봄이의 연필심들도 좀 더 긴 수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깊이 파인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잊을만하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는 했다. 봄이는 아직도 뜬금없이 나에게 묻고는 한다.
 "엄마, 그때 그 언니들이 왜 나를 그렇게 괴롭혔을까?"

 나는 늘 같은 대답을 한다. '나쁜'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데 실수란 있을 수 없다. 당시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실수였다고 간곡히 사정을 했고 그 덕에 그 사건은 흐지부지 되었지만 말이다. 그 아이들이 어떤 연유로 그런 성품을 가지게 되었고, 가치관이 잘못 정립되었건 간에,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물리적. 심리적으로 폭력을 가하기로 마음먹지 않고서는 학폭을 열만 한 사건은 생기지 않는 것이다.

 1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사건은 아직도 책상 위에 잔뜩 보이는 연필심의 잔해로 남아있다. 다행히 연필을 부러뜨리는 빈도는 많이 줄었지만 말이다. 그 연필심들이 책상 밑으로 굴러들어가 회전의자의 바퀴를 만나 바닥 가득히 시꺼멓게 흔적을 남긴 것을 보니, 봄이의 마음에 아직 남아있는 아픔이 가시화된 것만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친김에 회전의자를 엎어놓고 다섯 방향으로 난 바퀴들 틈새에 낀 때를 모조리 닦아냈다. 바닥에는 시꺼매진 물티슈 더미가 금세 생겼다. 상대적으로 깨끗해진 바퀴와 바닥을 보니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다 닦아냈을 무렵 친정 엄마가 오셨다. 20분의 내 휴식시간은 그렇게 날아갔다.

 며칠이 지나면 봄이 책상의 연필심은 또 쌓일 것이고, 회전의자의 바퀴는 그것들을 또 사정없이 문대어 새로운 얼룩을 바닥에 남길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닦아낼 것이다. 언젠가 연필심의 수가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바퀴도 바닥도 더러워질 일이 없기를 바라며 말이다. 볼펜을 쓰게 되어 연필심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려도 좋다. 물론 문득문득 연필이 눈에 보일 때마다 그 더러운 자국이 생각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봄이는 자신의 아픈 상처를 무한히 반복하여 되새기는 중이지만, 언젠가는 거기에 무뎌지고, 더 지나서는 특별히 떠올리지 않으면 기억해낼 수 없을 정도로 마음 깊숙한 곳으로 그 기억들이 장소를 옮겨갔으면 좋겠다. 엄마인 나는 언제든 봄이의 질문에 대답해주고, 봄이의 책상 바닥을 닦아줄 용의가 있으니 말이다. 스스로 해답을 찾는 수순을 밟고 있는 봄이의 옆에 서서 물티슈를 들고 대기하고 있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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