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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Oct 19. 2020

미역국이 맛있는 이유

그 어떤 식재료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큰 아이 봄이네 학교는 영어 수업이 꽤 많다. 일주일에 총 7시간 영어 수업을 하는데 2시간은 초등학교 3학년 정규 교과 영어 시간이고, 나머지 5시간은 사립학교인 봄이네 학교에서 자체로 개설한 '집중방과후' 영어 수업이다. 7시간 중 3-4시간은 원어민 선생님과 함께 공부한다. 영어유치원을 나오지도 않고 영어 학원에 그다지 열심히 다니지도 않았던 봄이가 3학년이 되면서 갑자기 원어민 선생님 수업을 듣게 되었다.  도무지 말을 못 알아듣겠다며 봄이는 한동안 영어 수업시간을 무척 싫어했다. 아닌 게 아니라 원어민 선생님들도 조금만 더 천천히 이야기해주면 좋으련만, 영어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말은 조금 빠르게 느껴졌다. 게다가 올해 수업의 대부분은 코로나 19로 인해 온라인 화상수업으로 이루어졌다. 모니터 화면을 통해 원어민 선생님과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봄이에게는 더욱더 힘겹게 느껴졌던 것 같다.


 2학기가 되면서부터 봄이네 학교는 레벨테스트를 거쳐 아이들의 영어 실력에 따라 반을 나누어 수업했다. 봄이리스닝과 스피킹은 약해도 단어를 많이 알고 있어  상급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상급반에는 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럭저럭 영어시간을 버텨내던 봄이도 상급반의 첫 시간 영어수업을 듣고 나오더니 결국 눈물이 터졌다. 아이들도 너무 말을 잘하고, 선생님 말이 빨라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것이었다. 기존에 들었던 수업보다 훨씬 어렵다며 울먹였다. 그렇잖아도 마음이 여리고 자신감이 부족한 봄이에게 영어수업은 큰 난관이었다. 결국 나는 온라인 수업기간 동안에는 봄이의 원어민 영 시간마다 함께 수업을 듣기로 마음먹었다. 모니터의 사각지대에 앉아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듣고 있다가 봄이가 못 알아듣는 말이 있으면 메모지에 써서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내가 봄이를 따라 방에 들어가 수업을 듣게 되자 거실에 남아있는 둘째 별이가 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발달이 느린 별이는 엄마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누나의 수업을 방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어쩔 수 없이 봄이의 원어민 영어 수업시간에 맞추어 친정 엄마가 우리 집으로 와주시기로 했다. 나는 방 안에서 봄이의 수업을 돕고, 엄마는 밖에서 별이를 달래며 돌봐주기 위해서 말이다.

 오늘은 반편성이 바뀐 후 3번째 원어민 영어 수업이었다. 영어 수업은 4교시라서 수업이 끝나면 바로 점심을 먹어야 했다. 봄이네 학교는 수업 전체를 실시간 화상수업으로 하기 때문에 4교시가 끝나는 12시 10분부터 5교시가 시작되는 1시 사이에 봄이도 점심 식사를 끝내야 한다. 그러려면 미리 식사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나는 봄이를 따라 수업에 들어가야 했기에, 시간 맞춰 집에 오신 친정 엄마에게 아이들이 먹을 미역국 끓이는 것을 부탁드렸다. 미리 미역을 불려두었고, 미역을 참기름에  볶다가 마늘, 국간장, 쇠고기만 넣어 끓이면 되었다. 엄마는 나보다 훨씬 미역국을 맛있게 끓이시니, 냉장고에서 대충 고기만 꺼내 드리고 나는 서둘러 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무사히 영어 수업이 끝나고 방문을 여니 고소한 미역국 냄새가 솔솔 들어왔다. 엄마는 아무리 끓여도 맛이 영 안 난다고 말씀하셨지만, 아이들은 미역국을 맛있게 먹었다. 수업이 끝나고 오후가 되자 엄마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셨다.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가 되자, 낮에 끓였던 미역국을 데웠다. 미역국 속에 큰 덩어리로 넣었던 고기를 작은 조각으로 자르기 위해 꺼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고기의 모양이 내가 알던 국거리 쇠고기의 모양이 아니었다. 미역국에 들어가는 쇠고기는 보통 양지머리라는 부위를 쓰는데, 익을수록 단단해지고 짙은 갈색을 띤다. 고기를 살펴보다가 아차 싶어 냉동실을 열고 아까 엄마에게 드렸던 고기가 들어있던 봉지를 꺼냈다. 유성펜으로 내가 써둔 글씨가 보였다. '돼지고기(찌개용)'. 급하게 꺼냈던 게 화근이었다. 고기의 색깔이 선명하지 않고 비계 같은 것이 보인다 했더니, 엄마는 내가 건네준 대로 찌개용 돼지고기 앞다리살을 넣고 미역국을 끓이신 것이었다. 나도 점심때 잠시 간을 보았을 뿐 미역국을 먹어보지 않아서 돼지고기가 들어간 것은 전혀 눈치챌 수가 없었다. 쇠고기나 조개를 넣은 미역국은 봤어도 돼지고기 앞다리살을 미역국에 넣는다는 얘기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돼지고기의 잡내 때문에 담백한  미역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미역국을 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미역국 맛이 안 난다며 불평하시던 엄마의 얼굴도 떠올랐다. 비록 직장생활을 했지만, 엄마가 집에서 전업주부로 살림을 한 세월도 이미 20년이 넘는다. 직장에 다닐 때에도 솜씨가 좋아 요리를 잘하던 엄마였다. 아무리 꽁꽁 얼어 있어도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구별 못할 엄마가 아니었다. 벌써 10년이 넘게 엄마를 괴롭히고 있는 엄마의 지병, '황반변성'이 뇌리를 스쳤다.

 황반변성은 망막에 문제가 발생해 눈 안쪽 깊숙한 곳에서 혈관이 자꾸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병이라고 들었다. 10년 전, 엄마는 오랫동안 치매를 앓던 할머니의 병간호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눈 속에서 혈관이 터져버려 오른쪽 눈을 아예 못 보게 되었었다. 부랴부랴 대학병원에 가서 시술을 받고 겨우 오른쪽 눈의 시력을 회복했지만, 그 이후 엄마는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안과 교수를 만나 눈에 주사를 맞아야 했다. 눈에 주사를 맞는다니, 말만 들어도 무서운 일인데 엄마는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까지 꾸준히 주사를 맞고 살아왔다. 완치는 어렵지만 병의 진행을 늦추는 주사약이었다. 얼마 전 다시 병원에 다녀오고 나서부터 최근 부쩍 시력이 떨어졌다며 걱정을 하셨다. 엄마의 시력은 지난 10년 동안 늘 나빠졌다가도 좋아지기도 하고, 다행히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기에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그 말을 넘겼었다. 그런데 오늘 돼지고기가 미역국에 떡하니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니 엄마의 시력이 생각보다 더 안 좋아진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신기한 것은, 비록 찌개용 돼지고기가 들어갔을지언정, 미역국의 맛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각에 예민한 엄마는 미역국의 맛이 평소만큼 나지 않아 꽤나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똑같은 마늘과 미역과 국간장을 써서 요리했는데도, 엄마의 미역국은 늘 내가 끓인 것보다 깊은 맛이 났다. 오늘도 그 깊은 맛을 내기 위해 가스레인지 앞에서 고군분투했을 엄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돼지고기가 들어간 것을 알고 아이들에게 저녁 식사 때에 미역국을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다. 그러나, 점심때에도 잘 먹은 아이들이었기에 아무 말하지 않고 미역국을 담아 주어 봤다. 역시나, 둘 다 맛있게 먹었고, 먹성 좋은 별이는 밥을 가득 말아 국물까지 다 먹어치웠다. 아무리 쇠고기가 아닌 돼지고기가 들어갔어도 할머니의 손맛이 더해진 미역국의 맛은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식사가 끝나자, 국 속의 돼지고기를 건져내고, 냉장고 속 다른 곳에 들어있던 진짜 국거리 쇠고기를 꺼내 미역국 속에 넣고 다시 끓이기 시작했다. 시간 지날수록 돼지고기 특유의 냄새가 날 테니 그냥 둘 수는 없었다. 한참을 끓였다. 내일 국을 먹을 때쯤 되면 쇠고기의 맛이 미역국 속에 우러나올 것이다. 그 국이 오늘 아이들이 먹은 국보다 과연 맛이 더 있을지는 모르겠다. 미역국이 맛있는  이유는 그 속에 들어있는 고기가 돼지고기건 쇠고기건 크게 문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 자식과 손주를 맛있게 먹이려는 엄마의 의지가 고기의 종류를 초월하여 손맛을 내게 한 것 같았다.


 내일 엄마에게는 그저 미역국이 아주 맛있었다고, 그래서 아이들이 저녁에도 맛있게 먹었다고 말씀드려야겠다. 점점 약해지는 엄마의 시력도, 그에 따라 약해질 엄마의 마음에도 더 많은 신경을 기울이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언제까지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먹을 수 있을까. 문득 냄비에 한 가득 담겨있는 미역국이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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