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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트로살롱 Oct 26. 2023

손님 초대가 별건가? 별거다

집순이 권태기를 극복하고 싶은 집순이



MBTI를 아주 신뢰하지는 않기 때문에 딱히 들먹이고 싶지는 않지만, I와 E의 성향 차이에 대해서는 꽤나 공감하는 바다.

나는 격하게 I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제일 공감할 때가 밖에 나가서는 너무 잘노는데 나가기까지 힘들고 귀찮음이 생각을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그건 손님 초대도 마찬가지다. 집에 누군가 온다는 건 해야할게 한두가지가 아닌, 아주 귀찮고 힘든 영역이다. 누가 온다고 하면 일주일 전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좋아서 그런게 아니라 걱정되고 불안해서다. 뭘 준비해서 어떻게 놀아줘야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누가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막상 손님이 오면 정말 재밌게 잘 논다. 그리고 돌아가면 바로 뻗어버린다. 나의 에너지가 다 소진된 탓이다.

해외살이의 맹점 중의 하나는, 집에 손님이 꽤나 자주 온다는 것이다. 특히나 한국에서 잘 알려진 대도시에 살때는 손님이 끊이질 않는다(지난 프라하에서의 삶이 그랬다. 매달마다 누군가 당연히 온다고 생각하면 된다). I 성향인 나도, 적적한 해외살이에서 손님이 오는 건 꽤나 반가운 일이라 그 사람을 따라 나도 같이 기분이 들뜨고 즐거워진다. 무언가 해먹일 생각에 마음도 들썩이고 어떤 메뉴를 정할지에 대한 고민도 즐거움의 연장선상에 있게 된다. 그렇지만 준비 기간엔 영락 없이 두려움과 불안함이 생각을 지배한다.

말레이시아에 이사오고 나서도 손님들이 여러번 왔다 갔다. 가족이나 친구의 방문은 당연하고 지인의 방문도 드문드문 있었다. 이번에 집에 온 손님도 남편의 지인이다. 남편은 발이 넓으면서도 좁은, 약간 독특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아는 사람은 아주 많지만 웬만큼 친하지 않으면 집안에 들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집에 초대로 오는 사람들은 남편과 각별한 사람들이라 여간 신경쓰이는게 아니다. 일로 오게된 이분 역시 남편과 오래 알던 분인데 나와는 처음 만나는 사이라 꽤나 조심스러웠다.

지인 맞이에 닳고 닳은 지난 십여년. 그간 쌓아온 나만의 손님 초대 노하우가 있다. 사람을 집에 들일 때 어떤 조건을 만족시켜줘야 하는지에 대한 노하우랄까. 일단은 손님의 성향이 어떤지 그리고 부부 동반인지 혼자 오는지에 따라 식탁 꾸밈과 집안 분위기를 살짝 바꿔준다. 깔끔한 성격이라면 보이는 부분도 깨끗이 청소하고 욕실 청소에 특히 신경쓰는 편이다.

그리고 부부 동반이라 와이프가 같이 온다면 식탁 꾸밈이나 식기를 신경써서 준비한다. 남자들끼리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 식탁 꾸밈, 식기에는 크게 관심이 없고 음식만 떨어지지 않게 넉넉히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번에 오는 손님은 음식은 가리지 않고 잘먹으나 입이 짧은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여러가지 메뉴를 준비하되 양을 적게 하기로 마음 먹었다. 우리 가족이 다같이 먹을 거라 우리 먹는 양에 조금만 더해서 만들었다. 한국에서 오는 분이고 여기 와서 말레이시아, 중국 음식만 먹었으니 서양 요리를 하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오븐 요리. 오븐 요리는 만들기가 어렵지 않고(오븐에 일단 넣으면 되니), 손이 덜가는데 나중에 차렸을 때 꽤 신경쓴 티가 난다. 메뉴를 정한 다음에는 마트 두군데를 들러 필요한 재료를 사고 돌아갈 때 가져갈 간단한 선물도 준비했다. 재료 준비하는 중간중간에는, 집안의 보이는 곳들을 더 깔끔히 정돈하고 구석구석 청소도 했다.

손님 한번 오는데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지만, 우리 가족을 속속들이 잘 알고 집에 먼지가 굴러다녀도 아무렇지도 않은 지인이 아닌 이상, 겉으로는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는게 성격인 걸 어쩔 수 없다.






예전에 다른 해외 사는 지인의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남편 친구 집이라 둘은 스스럼 없는 사이였으나 그 분의 와이프는 처음 보는 사이였다. 성격도 워낙 좋아서 금방 서먹함 없이 친해지긴 했지만 그 집의 욕실에 들어가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내 생각에는 자고 가는 손님을 들이면 일단 집 청소부터 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집은 뭐랄까. 욕실 청소는 이사갈 때나 하는 것, 이라는 생각을 가진 듯한 공간이었다. 어느 곳 하나 말끔한 곳이 없어서 그냥 내가 눈 감고 샤워하고 세수를 했다. 어차피 우리집이 아니니 내가 신경쓸 게 아니니까. 아, 그렇다고 우리집이 항상 깨끗한 건 아니다. 손님이 와야 그나마 깨끗이 유지되는 정도랄까. 먼지 쌓일 일 없이 매일 쓸고 닦고 하는 분들 사실 존경스럽다. 그런데 집에 손님이 와도 눈하나 꿈쩍 안하는 그 분은 대단해 보였다. 손님이 온다고 해서 굳이 청소하지 않아도 실은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음식도 마찬가지였는데 미리 음식 준비도 해놓지 않고 같이 장보러 갔다가 와서 그제서야 같이 요리를 하고 식사를 했다. 미리 준비해 놓는 건 아무 것도 없었지만 결국엔 문제될 게 전혀 없었다. 물론 우리가 편한 친구 가족이라 그랬을 테지만 그날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손님이 돌아가고 난 다음 그대로 뻗어 버리고 며칠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을 테야, 라고 넉다운되는 이유는 내가 너무 신경을 쓴 탓이라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나도 그냥, '조금 내려 놓으면 될 것을 뭘 그리 난리를 치면서 손님 맞이를 하나', 라는 생각이 지배하던 찰나 또다른 면의 강적을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은 이전에 만났던 사람과는 정반대로 아주 심하게 깔끔한 성향을 가진 분이었는데, 가족이 집에 오더라도 자고 갈 일이 생기면 기본 일주일 전부터 준비를 한다고 한다. 나는 너무나 궁금했다. "왜요? 일주일 전부터 뭘 하시는데요? " 그분은 대답은 명료했다. "당연히 이불 빨래부터 시작해야죠. 모든 식기도 사람 수에 맞춰 꺼내놓고 김치 담그고 반찬하고 청소도 해야하니까요."

아, 나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저 I 성향을 가진 집순이일 뿐.

이번에 온 손님이 돌아가시면서 정말 잘 드셨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평소에 못먹을 게 무얼까 고민하다가 집어온 그린 망고를 디저트로 내놨더니 그게 특별했다고 하셨다. 그런 말이 괜히 기분이 들떠서 또 좋았다. 손님을 보내고 다음 날 집에서 혼자가 된 나는, 아이스크림에 에스프레소를 내려 마시면서 혼자만의 여유를 만끽했다. 당분간 손님 초대는 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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