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을 통해 일어난 두 번째사건은 더 큰 사건이었다. 22년 5월 에피톤프로젝트 뮤직비디오 출연의 여운이 가실 때쯤인 같은 해 10월의 어느 날,또 한 번인스타그램으로 DM 왔는데,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진행 중인 전시와 <타이핑 워크숍> 연계 프로그램 진행에 대한 제안이었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을 구현하기 위해 백남준의 사상과 예술활동에 대한 창조적, 비판적 연구를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된 곳으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한 곳이다.
"아니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왜?"
인스타그램 DM을 보면서 놀랍고 어리둥절했다. 제안의 배경이 당시 10월 13일에 개막한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 전시연계라고 하였는데, 도저히 이 세계적인 예술가의 전시와 타자기가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없었다. DM으로 회신을 하고 이메일을 받아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예술가가 아닌 정책가로서의 백남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가 백남준은 세계적인 비디오아티스트로 알고 있다. '예술가'라는 정체성은 백남준에게 다양한 페르소나 Persona 중 하나였던 것이다. 필자뿐만 아니라 독자 여러분들도 누구나 한 가지가 아닌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않는가? 집에서, 직장에서, 동호회에서... 등등. 예술창작 활동 외에도 그는 문화예술과 관련한 다양한 정책을 제안하기도 하고 컨설턴트로서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전시는 백남준 탄생 9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으로 「종이 없는 사회를 위한 확장된 교육」(1968), 「후기 산업사회를 위한 미디어 계획」(1974), 「PBS 공영 방송이 실험 비디오를 지속하는 방법」(1979)까지 1968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에서 영어로 작성한 주요 보고서를 바탕으로 정책가 백남준을 조명하는 전시였다. 1960년대 사회 전환기, 변화의 흐름에 주목한 미디어 컨설턴트 백남준을 들여다보는 전시의 의미는 지금까지 예술가 백남준 연구에서 주목하지 못한 일련의 과제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의 전자예술 작업과 새로운 접점을 마련한다고 했다. 백남준은 이 정책 보고서들을 아날로그 타자기로 직접 작성했다고 한다. 필자도 타이핑 워크숍을 통해 보고서를 읽어보게 되었는데, 보고서를 읽어보고 나서 백남준이란 사람의 사유와 통찰이 정말 시대를 많이 앞서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 홍보물> 출처. 경기문화재단 블로그
그래서 타자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1960년대 말이니 문서작성은 타자기를 사용하던 때이다. 실제 백남준은 올리베티사의 타자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전시기획자는 이 전시를 어떻게 더 알리고, 백남준의 작품 세계를 잘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전시의 기획의도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고자 고민했던 것 같다. <타이핑 워크숍>을 통해 백남준이 남긴 보고서의 의미도 알아보고, 백남준처럼 직접 타자기로 보고서를 필사해 보는 시간을 구상했던 것이다. 전시기획 코디네이터로 근무하던 직원이 연계프로그램을 구상하며 리서치를 하던 중에 내 인스타그램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타자기를 다루는 나의 인스그램에서 타자기에 대한 열정과 전문성을 느껴 워크숍 연계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연락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생각하지도, 경험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타이핑 워크숍>이라니 정말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홀로 방구석 취미였던 타자기를 여러 사람들과 워크숍으로 함께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유연했던 기획자들
담당자가 보낸 메일을 확인하고 다시 회신과 회신을 반복하며 대여섯 번의 메일이 오고 갔다. 공공기관에서 진행하는 사업의 경우는 진행과정에서 행정적인 한계로 인해 담당자들의 의지와 달리 유연성이 부족해질 때가 있다. 나 역시 직업적으로는 행정이나 기획업무를 주로 다루고 있어서 그 부분에서 충분히 이해와 양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워크숍 준비와 관련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획자들은 유연했고, 협조적이었다. 워크숍 진행과 관련해서 내가 우표를 제작하자는 제안도 했는데, 그런 제안마저도 다 받아들여져서 준비가 가능하도록 해 주었다. 시간이 지났지만 두 분의 기획자와 백남준아트센터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워크숍 진행을 수락하면서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일정과 시간, 장소가 확정되고, 워크숍 참여인원이 정해졌다. 많은 인원이 참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장에서 보조강사 없이 혼자서 워크숍을 진행하려면 너무 많은 인원을 받기에도 부담스럽다. 참여인원은 15명을 기준으로 논의하다가 최종적으로 12명씩 하루에 2회 차로 진행하는 것이 정해졌다. 이 중에서 영문보고서를 필사할 영문타자기 6대와 한글로 번역한 한글보고서를 필사할 한글타자기 6대로 정해졌다. 한글타자기는 필자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네 벌식을 쓰기로 했다.
12대의 타자기와 교재준비
회차별 12명의 워크숍 참여인원이 정해졌으니 참가자들이 사용할 12대의 타자기가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나에게는 약 60대 정도의 타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타자기는 필자가 백남준아트센터 측에 대여하는 방식으로 정리하고 직접 워크숍에 사용할 타자기를 준비를 하게 되었다. 나에게 타자기가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워크숍을 직접 진행하는 입장에서는 컨디션이 어떤지 모르는 남의 타자기로 진행을 하려면 생각지도 못한 변수까지 고려해야 하므로 내 입장에서는 내가 직접 관리하는 타자기를 가져가서 쓰는 것이 훨씬 변수를 줄이고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타자기 중에서 가장 컨디션이 좋은 영문타자기 6대와 네벌식 한글 타자기 6대를 골랐다. 강사용으로 설명할 타자기도 한 대 있어야 하고, 현장에서 갑작스러운 문제를 대비해 여분의 타자기를 2대 더 준비했다. 준비된 타자기는 총 15대. 백남준 작가가 주로 사용한 타자기가 올리베티사의 타자기라고 해서 영문타자기는 대부분 같은 올리베티사의 것으로 준비했다. 워크숍의 진행순서와 진행방식을 고려해서 시간의 안배를 어떻게 하여 진행할 것인지 고민도 해야 했고, 그에 맞게 교육자료도 준비했다. 지나고 보니 이런 준비과정을 거치며 타자기 사용방법을 어떻게 쉽게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해 볼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타자기를 난생처음 접하는 참가자도 있을 터, 그런 분들이 길지 않은 설명을 듣고 짧은 시간에 혼자서 필사의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하니, 설명은 간단명료하되, 워크숍에 필요한 간략한 배경지식과 사용법 위주로 정리하여 교안을 만들었다. 이런 류의 강의를 준비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필자는 소위 '미대' 출신으로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 정확히 말하면 '산업도자디자인'을 전공했다. 과거에 청소년이나 성인, 장애인을 대상으로 도예수업을 했던 경험도 수 차례 있었고, 지금도 문화예술기관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인지 교육자료의 준비나 워크숍의 진행이 그다지 부담스럽거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교안의 준비도 많은 신경을 썼지만 타자기 준비에도 나름의 디테일이 있었다.
키캡에 테이핑을 한 타자기(왼쪽), 워크숍 준비 덕분에 처음으로 만들어 본 교재(오른쪽) ⓒ 레뜨로핏
준비된 한글 네 벌식 타자기의 경우는 처음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자판이 익숙하지 않다. PC에서 보통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자판은 한글 두 벌식 자판이다. 때문에 자판의 문자배열도 다르고, 입력방식도 전혀 다른 수동타자기를 이용해 한글을 입력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란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참가자들의 네벌식 자판의 접근성을 조금 더 높이고자, 한글 타자기 8대 모두 다 키캡에 컬러테이프로 마킹작업을 했다. 네 벌식 수동타자기를 처음 사용할 경우 대부분 자판배열에서 가장 헷갈리는 부분이 받침이 있는 중성키와 종성키이다. 그래서 이 부분만 시각적으로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받침이 있는 중성키는 노란색으로 종성키는 파란색으로 모두 테이핑 작업을 하였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며칠 밤은 타자기 세팅 상태를 점검하느라 시간을 다 썼다. 사전에 공유받은 한글 번역본 보고서를 보고 직접 타이핑을 해 보면서 타자기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문제가 있는 타자기는 다시 다른 타자기로 바꾸면서 선별작업을 하였다. 영문타자기는 상대적으로 수월했지만 역시 영문보고서를 필사하면서 상태 점검을 모두 마쳤다.
백남준의 보고서 타이핑 워크숍 | 웹페이지 _ 출처. 백남준아트센터 홈페이지
준비는 문제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드디어 홈페이지에 타이핑 워크숍 참가자 모집 공고가 올라갔다. 일정은 12월 3일 단 하루동안 2회 차로 24명의 참가자에게만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하루에 2회 차를 진행해야 했기에, 회차당 시간은 90분으로 정해졌다. 많은 인원이 아니었기에 참가신청은 기한 내에 모두 마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당일 노쇼가 약 10% 정도는 발생했으나, 전시 관람객 중에서 현장접수로 만석을 채워서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에 필자가 활동하던 타자기사용자모임 카페에도 워크숍 홍보를 하여, 카페 회원 중에서 신청하여 프로그램에 참여한 분들도 있었다. 준비는 모두 끝났고, 워크숍이 있는 당일 아침 서울에서 용인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를 향했다.
백남준아트센터전경(왼쪽), 입구에 안내판(가운데), 차 트렁크에 실린 타자기들(오른쪽) ⓒ 레뜨로핏
차량 트렁크에 15대의 타자기가 여유 있게 들어갔다. 운행 중에 도로에 과속방지턱이나 노면의 충격으로 타자기의 세팅에 영향을 줄까 봐 여유 있게 집을 출발하여 정말 천천히 차량을 운행하며 달렸다. 센터에 도착하자마자, 워크숍이 진행되는 1층 액세스홀로 타자기부터 조심히 옮겼다. 12월이라 입구부터 화려하고 멋진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거리며 입장객들을 반기고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에 워크숍을 알리는 고급스러운 작은 알림판이 눈에 띄었다. 액세스홀은 12명이 워크숍을 하기에는 충분히 여유로운 크기의 공간이었다. 내부가 잘 보이도록 한 쪽 벽면은 전체가 유리벽으로 되어 있어서 답답하지 않고 개방감이 좋았다. 뒤에 스탠드식 의자도 있어서 강연을 한다면 50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는 공간 같았다.
워크숍이 진행된 액세스홀(왼쪽), 워크숍 준비 중인 기획자들과 필자(오른쪽) ⓒ 레뜨로핏
공간뿐만 아니라 내부에 있는 가구들 까지 모든 디자인이 계획된 공간이라 그런지 테이블 자체는 너무 멋스럽고 공간과 잘 어울렸으나, 타자기 타이핑을 하기에는 다소 높고 불편했다. 사전에 테이블을 바꿀 수 있는지 물어봤으나, 쉽지 않은 것 같아서 타협하기로 했다. 인스타그램으로 나에게 연락을 주었던 담당 코디네이터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처음으로 대면인사를 나누었지만, 이미 전화와 메일로 계속 소통을 해 왔던 터라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프로그램 운영 경험이 많아서였을까? 그녀가 주는 의견이나 행동에서 필자 못지않게 프로그램 진행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느껴졌다. 준비성과 적극적인 행동들이 프로다워 보였고 정말 고마웠다. 덕분에 준비물들의 세팅이나 타자기의 배치까지 준비가 일사천리로 척척 진행되었다. 메인기획자인 학예사분의 환대도 인상적이었다. 준비가 끝나고 리허설도 간단하게 마치고 나서, 학예사분은 함께 전시장을 돌면서 전시와 작품에 대한 설명을 상세하게 해 주었다. 역시 기획자의 설명을 함께 들으면서 작품을 보니, 전시의 의도나 그 깊이감이 더 크게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백남준이라는 예술가의 위대함이 더욱 높아 보였다.
백남준 탄생 90주년 특별전 <백남준의 보고서 1968-1979> 전시장과 작품 ⓒ 레뜨로핏
신청자들이 하나, 둘 도착하면서 드디어 시작 시간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먼저 도착한 순서대로 자신이 맘에 드는 타자기 앞에 앉는다. 예상대로 참가자는 여성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 그럼에도 남자 신청자들이 전형 없지는 않았다. 중년의 남자분도 있었고, 커플로 함께 참여한 20대로 보이는 젊은이도 있었다. 준비할 때는 편안했던 마음이 갑자기 콩닥콩닥거리기 시작한다. 마음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던 긴장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애써 긴장한 표정을 감춰보려 하지만, 티가 나는지, 안 나는지 모르겠다. 타자기사용자모임 카페에 회원인 '노다', '운풍' 두 사람이 도착했다. 이미 일면식이 있는 분들이라 그런지 더욱 반갑고, 고마웠다. 인사를 나누고 나니 마음이 조금 더 편해진다. 노쇼 없이 12명의 참가들이 모두 도착하여 첫 시간 워크숍은 제시간에 시작할 수 있었다. 시작은 학예사가 전시기획의 배경과 의미 등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진다. 30분으로 안배된 시간에 맞춰 설명이 진행되었다. 뒤에서 같이 앉아서 듣는데, 백남준이란 예술가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다. 뒤에서 설명을 듣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다음 순서를 이끌어야 한다는 잊은 채 참가자 모드로 학예사의 설명에 빠져들고 있었다. 설명을 들으며 뒤에서 참가자들의 뒷모습을 살펴본다. 학예사의 설명에 집중하여 듣는 사람도 있고, 타자기를 빨리 치고 싶어서 인내의 한계가 오는 사람들의 미동도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니 정말 백남준이란 작가에 대한 관심과 그의 보고서를 필사하며 그 시절의 백남준에 빙의憑依 하며 오마주 Hommage 하고 싶어서 온 참가자도 있었던 반면, 타자기에 대한 관심이 우선이었던 참가자도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런 구분이 참가자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껴졌다. 학예사의 설명이 끝나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2022년만 해도 한창 코로나 시국이어서 공공장소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당연한 에티켓이었던 때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설명을 하기 위해 말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었다. 말이 너무 빠르면 마스크로 충분한 호흡이 들어오기 전에 말을 다시 내뱉어야 하기 때문에 호흡의 차분한 안배에 신경을 쓰면서, 설명의 내용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그리고 설명을 하면서 참가자들의 눈빛도 함께 살펴야 했다.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서 그들이 내 설명에 집중하고 있는지, 설명을 이해하고 있는지 표정을 볼 수 없으니,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빛과 몸짓을 보며 분위기를 살펴야 했다. 또한, 참가자들이 타이핑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확보가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다. 타자기를 생애 처음 만져보는 참가자도 있었고, 익숙한 사람도 간혹 보였다. 참가자들의 집중력은 정말 고마울 정도였다. 필사가 시작되자, 다들 진중한 모습으로 침착하게 타이핑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 공간 안에서 동시에 12대의 타자기가 타이핑을 하는 소리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 필자는 아직도 그때 그 감동적인 타자기 소리를 잊을 수 없다. 그 해 10월에 파주 활판인쇄박물관에서 타자기대회가 있어서 참가했었는데, 그때의 현장감이 느껴졌다. 다수의 사람들이 동시에 타자기를 타이핑하는 그 소리는 실로 귀와 가슴을 때리는 감동이 있다. 나에게 주어진 1시간 30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최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핵심만 짚어서 하고, 타이핑으로 넘어갔으나, 주어진 시간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음을 나와 참가자들 뿐만 아니라 학예사님까지 느낀 듯했다. 그래서인지 두 번째 시간에는 학예사님이 자신에게 배정된 설명시간을 10분 정도 더 단축시키고 참가자들이 조금 더 타이핑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 덕분에 두 번째 시간에는 시간이 모자랐다는 참가자들의 말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때 필자는 확신했다. 적어도 타자기로 워크숍을 하려면 설명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적어도 2시간 이상의 시간을 안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다시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시간에 쫓기지 않고 충분히 타이핑을 할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타이핑워크숍 진행 사진 ⓒ 레뜨로핏
먹지와 우표
워크숍을 준비하면서 담당자에게 워크숍 진행과 관련한 필자의 아이디어를 제안했는데, 유연하게 수용해 주었다. 담당자들에게는 계획에 없던 일과 예산이 추가로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에 사실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필자도 그런 부분에 대해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만약 수용이 되지 않았다면, 그냥 그대로 진행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런 제안까지 수용이 되었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내용적으로 더 풍성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담당자들의 이런 유연함이 기억에 많이 남는 부분이다. 내가 했던 제안은 두 가지였는데, 일단 먹지를 준비해 달라고 했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 타자기로 문서를 만들면서 문서의 원본과 더불어 사본이 추가로 필요할 때는 종이에 먹지를 추가하여 사용했다. 두 장의 종이 사이에 먹지를 끼우고 타이핑을 하면 첫 장에는 잉크리본에서 찍힌 원본의 글씨가 종이에 남고, 두 번째 장의 종이에는 먹지에서 찍힌 사본의 글씨가 추가로 찍힌다. 그래서 한 번의 타이핑으로 원본과 사본까지 두 장의 동일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물론 먹지를 사용한 사본은 원본만큼이나 글씨가 선명하지는 않다. 약간 흐릿한 글씨의 결과물이지만 그리 나쁘지 않다. 과거 타자기에서 사본을 만들었던 방식도 사람들에게 알려 줄 겸 이런 시도를 제안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제안은 주문제작 우표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온라인 우체국의 서비스 중에는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를 넣어서 주문제작형 우표를 제작해 주는 서비스가 있다. 문화예술기관에서 필자가 기획하고 운영했던 문화사업에서 가끔 프로그램의 의미를 상기시키며, 작은 기념을 할 수 있도록 우표를 제작했던 경험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때처럼 포스터에 있는 타자기 치는 정책가 백남준의 사진이 담긴 우표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먹지를 이용해 만든 사본은 또는 원본 중에 하나를 편지봉투에 넣고 준비된 우표를 붙이고, 자신의 집으로 부치거나, 이 전시를 추천하고 싶은 지인의 주소로 부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부 참가들은 우편을 부치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우표를 활용해 자신이 타이핑한 결과물을 봉투에 넣어 편지처럼 부쳤다. 프로그램 참가의 기억이 서서히 가실 때쯤 그 우편물로 인해 다시 한번 타이핑 워크숍의 기억을 떠올리기를 희망했다.
타이핑 결과물을 봉투에 넣어 우표를 붙이는 참가자와 주문 제작된 우표, 우편봉투 ⓒ 레뜨로핏
사실은 강사의 만족도가 제일 높았다.
하루 동안에 오전, 오후 2번의 워크숍을 진행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강의를 업 業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더 그러했다. 센터에서 진행한 전시 연계 프로그램 중에서 참여율이 높은 편이었다는 담당자들의 귀띔이나, 주관적인 느낌일 수 있으나, 현장에서 필자가 느낀 참여자들의 만족도는 분명 높아 보였다. 백남준아트센터의 운영을 총괄하는 센터장님이 직접 오셔서 워크숍을 둘러보시고 인사까지 나누고 갔던 부분도 기억에 남는다. 예의상 인사일 수 있으나, 센터장님의 표정에서 워크숍에 대한 만족스러움을 느낄 수 있어서 필자도 마음이 편했던 기억이 난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워크숍 이후에 일부 참가자의 반응이었다. 워크숍에 참여한 카페 회원들의 후기가 타자기 카페에 올라가서 여러 회원들에게도 워크숍 내용을 전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어느 참가자의 블로그에는 타이핑 워크숍 후기가 올라가 있었고, 필자의 인스타그램 댓글에는 이번 워크숍의 영향으로 타자기를 본격적으로 입문하려고 타자기를 구매하게 되었다는 댓글도 있었다. 그 참가자는 타자기사용자모임 카페에 회원으로 가입까지 하였다. 한 명일지라도 이 워크숍을 통해서 누군가 타자기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가졌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보람과 기쁨이었다. 어쩌면 타이핑워크숍의 큰 수혜자는 바로 '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를 계기로 필자는 이듬해인 23년부터 타자기 워크숍 운영에 대한 리서치와 콘텐츠 개발을 위한 연구 중이다. 언젠가는또 다른 공간에서 타자기로 새로운 참가자들과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타이핑 중인 참가자들의 손과 여러 타자기들 ⓒ 레뜨로핏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우리의 손에 쥐어져 있지만, 지금도 타자기를 치켜세우는 나 같은 사람이 존재하듯이, 아무리 고성능의 스마트폰이 나오더라도, 타자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대가 변했지만 타자기는 사용자들에 의해 그 쓰임이 계속 진화하되, 본질은 유지되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 안식을 주고, 문화를 향유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따라서 타자기는 앞으로도 인류와 함께 영원할것이다. - 레뜨로핏 생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