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늘 그렇지요.
그때 우리는, 서로 어렸다는 이유로, 그래서 할 수 있었던 거칠었던 말들로, 오래 기억에 남았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소리치며 할퀼 일이 아니었는데, 감정이 복받쳐 욕과 다를 바 없는 말로 남겨졌습니다. 혹시 까마득히 잊었다면, 그것 만큼 감사한 일도 없지만 당신의 그릇이 넓고 훌륭한 인품을 가진 덕분입니다.
딸기 우유와 편지 한 장은 내가 가진 무기였고, 줄 수 있는 최대의 마음이었습니다. 직접 전할 용기가 없어 문고리에 걸어두고 지나쳤지만, 정말로 들키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사랑을 담은 마음의 설렘과 달리, 사랑이 전해진 후 닥쳐올 절망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도 완성되지 않은 과도기를 가장 뜨겁게 여기다 완성을 향할 때쯤 아무렇지 않은 듯 마음을 닫는 버릇이 있습니다.
한 철의 기억이 영원한 상상과 후회를 남겼습니다. 아픈 허리가 기승을 부리고, 따끔한 일들이 정신을 사납게 할 때면 이게 다 용서받지 못할 일들을 벌인 탓 같습니다. 내가 모진 말들을 듣고, 모진 감정에 숨이 막히고, 혼자 삭혀야 하는 일들을 겪다 보니 아주 사소한 말조차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염치의 마음을 이제야 압니다. 그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묻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만큼 죄를 지었습니다. 나에 대한 기억이 어느 날 괜찮던 일상을 헤집어 놓았을까 걱정이 됩니다.
어렸다는 말을 모든 변명으로 대신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못나게 굴었던 나를 잊어달라는 말만큼 부질없는 소리도 없을 겁니다. 연락 한번 안 할 것 같던 제가 뜬금없이 전화를 걸었던 적도 있습니다. 아주 멋쩍은 소리를 하며 잘 지내시는지, 고마웠던 기억이 많아 안부라도 여쭙고 싶었다는 말을 하고, 더 말을 잇지 못해 정적만 남기고 끊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또 다른 이별을 만들었습니다. 오랜만의 연락은 의미를 찾을 틈도 안 주고 또 멀어진 사이를 만들었습니다. 너무 바보 같지만, 이제라도 조금의 진심을 전한 것 같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내려 앉히고,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부여잡았습니다.
나는 뭐든지 늦고, 뒤로 숨는 게 편했습니다. 내가 먼저 말을 걸고, 어설프더라도 여러 표현을 섞어 빈곤한 겉이 아니라 진심 가득한 속을 꺼냈어야 했는데 아쉽습니다. 당신의 세상 안에서 있는 낡고 바랜 사진이라도 좋으니 곁의 어디쯤으로도 남았으면 좋았을 텐데, 무엇이 그리 부끄럽고 부족하여 알아서 비켜주었던 사라진 세월만 생각납니다. 여전히 사진에 찍히는 걸 경계하고,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불편합니다. 거울 앞에 선 나를 볼 때마다 작은 용기라도 내어 보자며 다짐하지만, 거울에 남겨진 건 아무 흔적도 없는 투명한 유리뿐입니다.
올해도 얼마 안 남았습니다. 나의 마음이 편한 방법으로 멀리서 안부를 전합니다. 내가 전하는 마음이 잘 닿아 내년에는 훨씬 행복하게 살았으면 합니다. 이제 연락처도 기억이 잘 안 나서 괴롭힐 일도 없습니다. 새로운 시간과 당신이 만들어 낼 갖가지 삶들이 완벽할 것이라 믿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