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은
오후 아홉 시가 넘으면 너의 머리맡에 있는 라이언 친구는 회색에서 노란빛을 머금은 색으로 변한다. 그럼 너는 베개에 누워 다리를 뻗고 눈을 두 번 정도 번갈아 비빈다. 금세 잘 것 같다가도 참고 버틴다. 엄마가 곧 올 것만 같아서, 옆에서 책 몇 권을 읽어줄 것 같아서, 자기 전에 엄마는 오늘 무얼 했는지, 나의 하루는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눠야 해서 끝까지 잠들지 않는다. 너는 새벽부터 일을 나가는 엄마의 빈자리를 남겨두고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오는 엄마로 채운다. 그런 너를 볼 때면 엄마의 말이 떠오른다. "나의 영혼과 수명과 영양분의 절반 이상을 바쳐 빚어낸 유일한 사랑이야." 나는 끈끈한 너희 둘의 사랑이 몹시 부러울 때도 있다.
아빠의 엄마에 대한 사랑은 너의 엄마에 대한 사랑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엄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너만큼 사랑했나고 묻는다면 자신이 없어 대답을 피할 것이다. 어른의 사랑이란 타올랐다 식었다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수평을 그리는 것이라 한다면 너는 웃을 것이다. 장난꾸러기 같은 소리라며 나를 흔들어 깨우려 할지도 모른다. 어떤 설명도 우리의 이해를 같게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아빠는 엄마를 향한 너의 숭고하고 깊은 사랑에 그저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다.
너는 할머니에게 물었었다. 할머니는 아빠를 더 사랑해, 아니면 나를 더 사랑해. 할머니는 귓속말로 지금은 너를 더 사랑한다고 말했다고 자랑했다. 아빠는 옆에 있는 엄마와 나를 낳아 주신 엄마를 너에게 뺏긴 것만 같다. 하지만 그 사랑만큼 너의 마음이 무럭무럭 잘 자라 어떤 일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것 같았다. 너도 어렴풋이 느끼겠지만 사랑이란 서로를 이롭게 하고, 위대한 순간을 만들어 낸다.
엄마의 사랑과 할머니의 사랑만큼 아빠의 사랑도 못지않게 컸으면 좋겠다. 우리가 부모자식의 인연으로 살아가지만, 과한 사랑을 경계하고 서로의 독립과 홀로 서는 삶을 알기 위해 아픈 말들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때마다 새어 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눈치를 보는 너를 본다. 안아주고 격려할 법도 한데 행동이 느린 나는 뒤늦게 후회를 한다.
몇 살 되지 않은 네가 일하느라 바쁜 엄마에게 심심하다며 놀아달라고 세차게 칭얼댔던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는 너의 눈을 보며 말했다. "잘 들어. 사는 건 이렇게 아무런 것 없이 심심하고 무료할 때도 있는 거야. 그럴 때마다 너는 답답할 게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는 거야. '아, 세상은 이렇게 재미가 없을 때도 있구나. 나랑 놀아줄 사람이 없을 때도 있구나.' 하고 말이야. 왜냐하면 엄마는 너랑 다르잖아. 우리는 가족이지만, 가족이라고 다 같은 생각과 마음을 가진 건 아니야."
엄마의 말이 날카롭게 전해 졌겠지만 아빠는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심심하고, 외롭다 느낄 땐 비로소 나를 더 잘 볼 수 있다. 그때마다 사람에게 기댈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세상에서 잘 쉴 수 있어야 한다. 아빠는 네게 다른 말을 해 줄 재주가 없다. 다만, 아빠는 너의 시선이 닿는 곳에 살면서 길을 잃었을 때 손을 잡아 주고, 주저앉고만 싶을 때 옆에서 말을 걸어 주며, 너의 세계는 넓게 펼쳐져 어디서든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알려줄 뿐이다.
아빠는 먼저 경험했다.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 세상은 누군가를 위해 나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을. 가끔 그것에 대한 보답을 받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당연히 해야 할 일쯤으로 여긴다는 것을. 또, 꿈처럼 영원하거나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것을. 가끔 그것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별의별 일에 금세 잊게 된다는 것을.
그때마다 멀리 도망을 갔고, 도망을 간 곳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단다. 어디로 가든지 어느 곳에 있든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같아 세상을 사는 게 이렇게 별로인가 싶었던 마음도 들었다. 그러다 아빠의 세계를 돌아보게 되었고, 내 안의 세상은 여전히 아빠를 일으키고 있었단다.
아빠는 꼭 말해주고 싶다. 언제나 너를 위해 살라고 말이다. 너의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것들은 생각보다 집념이 있고 끈기가 있다. 아마 그건 우리가 죽는 날까지 곤두선 신경으로 다시 깨우고 일으킬 것이다. 나는 그것을 외면하고, 주변에 휩쓸려 자신의 색을 잃어가는 너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사랑할 것이다. 너의 세계는 너만의 것이고, 어떤 것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