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후의 순간
묵직한 공기, 습한 기운, 모기의 습격까지. 초가을의 풍경을 맞이하려면 참 많은 것들을 견뎌야 한다. 세차게 내리는 비까지 동반된 그날은 한 주에 기적 같이 찾아온 주말의 바깥나들이를 막아서는 얄미운 손님이었다.
아내는 딸에게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주라며 주말에 어디를 갈지 늘 생각해 보라 하는데, 언젠가부터 머릿속이 고장 나고, 누워 있고만 싶은 몹쓸 남편이 되었다. 한 끗 올라온 우울과 번아웃이 몸속 깊숙이 기승을 부리면서, 직장이 벼랑 끝처럼 느껴진다. 그걸 핑계로 쉼이 있는 주말을 바라는 나도 참 못났다.
비가 그쳤다. 맑은 하늘을 수놓은 구름, 시원한 바람, 강렬한 태양이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완벽한 날씨만큼 기분도 좋아졌다. 계획된 일정이 없던 우리에게 안성맞춤인 곳은 서울숲이었다.
서울숲은 아이를 키우면서 부쩍 자주 가는 곳이 되었다. 거리도 가깝고, 볼 것도 많고, 놀이터가 있어서 갖가지 활동이 가능하다. 또, 공원 안이 평지라서 자전거나 킥보드를 타기에도 좋다. 최근에 아내가 회사 사람들과 풋살을 시작하면서 축구공까지 챙겨가서 공을 찬다. 짐이 많아져 불편하긴 하지만 이것저것 차에 실을 때마다 우리끼리도 할 게 많다는 생각에 흐뭇한 기분이 든다. 오늘은 돗자리도 챙겼다. 도시락도 싸고 과자도 몇 봉지 챙겨서 가을의 소풍을 떠났다.
화창한 날씨로 돌아선 오후의 서울숲은 걷는 곳마다 선명한 색을 머금고 있었다. 아내와 딸은 저 멀리 곤충 채집을 하는 아이들과 선생님을 보고는 무슨 곤충을 잡았나 싶어 뛰어간다. 사마귀, 잠자리, 나비, 여러 곤충이 채집통 안에서 먹이사슬을 이루고 있었다. 아내는 딸에게 곧 있을 잠자리와 나비의 운명을 알려줬고, 딸은 운명을 달리할 먹잇감의 미래를 생각하며 슬퍼했다.
"곤충의 세계는 그런 거야. 저건 뭐야? 엄마도 처음 보는데 가서 물어보자." 동심과 호기심이 충만한 아내는 아이들 틈에 둘러싸여 이모저모 정보를 얻고는 딸에게 전해준다. 언제나 딸의 앞에 서서 펼쳐지는 여러 세상을 알려주고 앎을 채워주는 아내가 새삼 훌륭하게 보였다. 늘 뒷걸음질로 가족의 주변을 서성이며 말없이 자리하는 나는 원래 정해진 역할이 조연인 것처럼 굴지만 실은 육아에 미숙하고 관심이 부족한 아빠였다.
놀이터에 다다르니 이용 금지 선이 몇 군데 붙어 있었다. 계속 내렸던 비 때문에 시그니처인 긴 미끄럼틀을 탈 수 없었다. 우리 딸은 예전과 달리 아쉬움에 울먹거리거나 계속 타겠다며 떼쓰지 않았다. 대신 2인용 그네로 가서 엄마와 커플로 몇 십 번을 타고는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항상 놀이터가 마지막 코스였는데 비 덕분에 공원의 이곳저곳을 가보게 되었다. 나무로 된 육교를 거닐며 사진도 찍고, 꽃과 식물이 가득한 아치형 정원에서 흔들 계단을 오르며 희희낙락한 시간을 보냈다. 아이가 놀만한 곳만 찾다가 가족들과 예쁜 것들을 눈에 담아 가는 기회를 얻고 나니 조금 더 머물고 싶어졌다. 그러다 어느 곳에서 음향 체크하는 소리와 함께 관중과 아티스트가 모여 있는 공연장을 보게 되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공연장 외곽에 설치해 놓은 천막 사이를 훔쳐보니 재즈 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어떤 언니가 노래하나 봐. 우리도 앉아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노래 들을까?", 가져온 돗자리를 깔고 김밥과 과자를 풀어 자리를 잡았다.
소풍의 백미는 야외 놀이 후 먹는 음식들이었다. 차린 건 얼마 없지만, 이토록 맛있고 달콤한 것들이 있을까. 아이를 위해 준비한 간이 덜 된 김밥과 어른을 위해 준비한 매콤한 김밥이 금세 없어지는 사이 잔잔한 노랫말에 얹은 어느 가수의 음색이 공기를 타고 우리의 귓가로 전해졌다. 나도 아내도 놀라 "누구야? 왜 이렇게 잘해? 너무 좋다. 저기 화면 좀 봐. 심지어 너무 예쁘잖아? 자기가 누군지 찾아봐!"
딸은 배가 고팠는지 빠른 속도로 김밥을 먹어 치운 후 <오! 감자>를 부리나케 뜯으며 한 움큼씩 먹기 시작했다. 음악에 넋 놓고 누워 있던 아내는 황급히 일어나 과자 봉지에 손을 집어넣고, 또 다른 손으로는 딸의 옆구리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야~치사하게 혼자 먹지 마. 엄마도 좋아하는 맛이라고! 맛있는 건 같이 먹어야 더 맛있다고~천천히 먹어!" 모녀가 과자 한 봉지를 두고 열심히 다투는 사이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요한 바다에 밀려오는 잔잔한 파도 같았다. 거친 것들을 떼어내고, 곱게 빚은 것들만 모아 평온의 물결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이곳의 모든 푸르름을 잠깐이라도 여행하라는 듯 마음속의 지도를 만들어 항해를 떠나게 했다.
잠이 든 건지 몽환의 여행을 하고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눈이 감겼다. 아내와 아이도 어느새 서로 기대어 더 바랄 것 없는 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시간을 멈출 수 있다면 그 순간을 선택했을 것이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고, 걱정과 불안을 잠재우는 영롱한 소리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Time flies 매일 더 빠르지
그럴수록 더욱 천천히
여유롭게 머무르기
Yeah I like it better like this
플레이 버튼을 눌러 Tracks waiting in line
뒤집어 다시 듣고 싶은 노래 rewind
걸음은 조급하지 않게
늦은 건 없어 내 페이스로 갈게
아, 이건 한 번 더 들어야 돼
다시 듣고 싶은 노래 rewind
탁 트인 하늘을 들이마셔
두 눈으로 담아내 horizon
불어오는 산들바람
들려오는 background music
Your love's put me on the Top of the world
스텔라장, '워크맨'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