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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시헌 Mar 03. 2024

<쇼펜하우어의 유행>

알라딘 기준 최근 인문학 5주 연속 베스트셀러가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고 한다. 같은 철학자의 교훈을 담은 <쇼펜하우어 아포리즘-왜 당신의 인생이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도 철학분야에서 5주 연속 TOP100안에 들었다. 이른바 쇼펜하우어 열풍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쇼펜하우어 자기개발서 열풍에 더 가깝겠지만.      


처음 이런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을 때는 갑자기 뜬금없이 철학책에서나 볼 법한 양반이 자기개발서 코너에도 같이 올라서 잠깐 놀라는 정도로 지나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쇼펜하우어가 계속해서 인문 분야 서적 부동의 챔피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정말 쇼펜하우어는 우리에게 정말로 행복을 주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먼저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쇼펜하우어의 철학 가운데에서도 내가 주목한 부분은 '행복론'이다.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쇼펜하우어 아포리즘-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테마는 '인생의 고통'을 다루는 내용인데, 대부분의 독자들은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보다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구글 트렌드에 검색한 결과 서울특별시에서 지난 며칠간 쇼펜하우어와 함께 검색된 키워드 중에 행복론이 표함되어 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의하면 바깥 세계는 우리의 감각과 표상을 통해서만 알려지되, 이 세계란  '의지'이다. 의지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설명할 수 없는 불변하는 유일한 세계이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의지, 그 자체가 세계인 것이다. 여기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종 차원의 생명의 의지 뿐인데 이는 무기물에서 식물, 동물, 인간으로 나뉜다. 무기물은 가장 낮은 단계의 의지이며 식물은 영양과 생명보존의 의지, 동물은 충동과 본능의 의지, 마지막으로 의지의 객관화가 가장 완전하게 이루어진 인간에게서만 지성이 발현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지성이 아닌 신체를 욕망의 주체로서 객관화된 의지로 보았다. 욕망에 앞서 신체의 기관을 형성하는 것은 내적 힘, 의지이며 이 의지는 신체가 지니는 욕망과 상응하게 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욕망의 작용은 지성의 작용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보았다. 욕망이 외부 대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 자체가 스스로를 의욕하면서 대상을 결정짓게 된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이 이성에 욕망이 따르는 것이 아니고 욕망 그 자체가 스스로를 욕망하는 것이다.      


더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이성은 생존을 위한 도구로 형성된 것에 불과하며 인간 행동의 동기를 결정하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살려는 의지다. 인간의 행동은 본능에 이끌려 쫓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의지의 발현단계에서 고등동물일수록 발달된 지성에 비례하여 고통도 커지게 된다. 감각이 없는 동물과는 달리 신경조직을 완전히 갖추고 고통의 인식능력이 정점에 오른 인간이기에 인생은 고통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이성은 생존을 위한 도구로서 살려는 동기를 창출해내는데 사실 삶의 객관적 기준이 되는 인간 본연의 개성으로서 존재하는 인생의 의미는 없으며 오직 생명의 의지만 존재하기에 실존적 헛수고를 하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다면 인간은 어떻게 행복할 수 있는가?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여 어떤 것을 성취한다해도 그것은 순간적인 만족에 불과한다고 보았다. 또한 욕망의 최대 만족 상태로 들어선다 하더라도 권태에 빠져 무료함의 고통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니 결핍과 권태 양극단 어디에도 들지 않되 인간의 무한한 탐욕을 지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쾌락을 쫓기보다는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인간이 균형을 잡기 위해 쾌락을 유발하는 본능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성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 분명 이성은 삶의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지만 대신 그 삶의 무의미함 속에서 인간이 무한한 탐욕에 삼켜져 고통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관조 이외에도 모든 의욕과 결핍에서 벗어난 예술을 통한 미적 관조를 통해 개인을 초월적인 상태로 만들어 인식은 의지에서 생기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이에 복종하지 않고 의지를 거꾸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쇼펜하우어 아포리즘-왜 당신의 인생이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의 내용은 어떠한가? 애초에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엮은 것이 책의 기본 내용이기 떄문에 쇼펜하우어의 논조와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편역자의 말을 먼저 보도록 하자. 여기서는 쇼펜하우어의 전반적인 인생과 배경지식 정도 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한 개괄이 적혀있다. 이에 따르면 쇼펜하우어는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우리 안에 깃든 욕망의 본질이라고 보았는데, 그중에서도 쇼펜하우어가 추구한 것은 가장 순수한 의지였으며 인간은 이 욕망을 내재적인 본능으로 가지고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성취'하고자 한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쇼펜하우어는 성취라는 것을 순간적인 쾌락으로 보았으며 세계 그 자체인 의지가 욕망의 본질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의지의 한 종류로서 욕망 혹은 본능을 나눈 것이다. 또한 순수한 의지라는 표현은 오히려 욕망의 표상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본능을 벗어난 미적 관조를 통해 초월하여 외려 의지를 통제해야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비튼 것이다.


 즉 맨 처음부터 이 책이 자기개발서였던 이유는 인생을 빗대어 욕망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가장 극도의 생존본능에 다다른 '가장 순수한 의지'까지 오르는 도정으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욕망을 극도로 추구하라, 살아남기 위해. 이것이 이 책이 쇼펜하우어라는 보자기로 숨겨놓은 본심이 아닌지 생각해본다. 지금 우리에게 베스트셀러로 보급되는 책은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을 자기개발을 목적으로 비튼 것으로 쇼펜하우어가 진정으로 가르쳐주고자 했던 행복을 전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참고자료]

1.강용수(Kang Yong Soo). "쇼펜하우어의 행복론." 철학탐구 40.- (2015): 149-180.

2.[책과 미래] 쇼펜하우어 철학이 유행하는 이유(매일경제,2024.02.23)

  :https://www.mk.co.kr/news/contributors/10949687

3.네이버 블로그:https://blog.naver.com/mingoo83/22336462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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