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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환 Oct 28. 2020

[엽문] 견자단의 엽문, 중국인의 엽문

 때로는 스포츠 스타가 민족영웅으로 대접받는다. 장훈이 그러했고, 최배달이 그러했다. 차범근이, 박지성이, 손흥민이 그런 대접을 받았다. 어려울수록, 힘든 시기일수록 이런 경향은 크다.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국가적’ 힘은 없지만 한 개인의 ‘물리적’ 힘으로 침략군을 두들겨 팰 때 민족적 카타르시스가 유별나게 넘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최배달만큼 중국도 일제 침략시기에 민족적 자존심을 불러일으켰던 무인이 있었다. 바로 엽문(葉問)이란 사람이다.


‘엽문’은 1893년 10월 1일 광동성 불산(佛山,포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엽계문(葉繼問)이란다. 불산은 지난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게임이 열렸던 광저우에서 옆에 있다. 아시안게임을 맞아 개통된 지하철을 이용하면 1시간 만에 도착한다. 엽문이 태어난 시대의 중국은 풍전등화의 형국이었다. 외세의 침략에 수천 년 이어오던 왕조가 무너지던 시대였다. 엽문은 어릴 때부터 영춘권이란 무예를 배웠고 고향 불산에서 무관을 열어 젊은이들의 심신을 단련시켰다고 한다. 일본이 노구교사건을 일으키며 대륙을 침공해왔다. 남경대학살, 그리고 곧 광주, 불산까지 점령한다. 이 어려운 시절 무인 엽문의 삶은 어땠을까. 2008년 개봉된 견자단 주연의 영화 <엽문>을 통해서 그 시절, 그 인물을 만나보자.


중화영웅 엽문, 침략군 미우라 대장을 쓰러뜨리다


1930년대 중반, 엽문 사부는 불산에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다. 사랑스런 아내 장영성(張永成)과 어린 아들 엽준과 함께 말이다. 그는 불산에서 영춘권을 제일 잘하는 고수로 알려져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의 무예를 존경해마지 않는다. 문제는 바로 그가 영춘권의 ‘소문난’ 대가라는데 있었다. 당시 불산은 무예의 총본산으로 거리곳곳에는 무관이 열렸고 수많은 무파의 사부들이 제자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외지에서 이곳으로 무관을 열려고 하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엽문을 찾아가 시비를 건다. 엽문만 깨뜨리면 단번에 최고의 무술사부로 소문날 것이니 말이다. 이런 소동이 마뜩잖은 아내. 정체도 알 수 없는 험상궂은 사람과 끊임없이 소모적인 대결을 펼친다는 게 싫기는 엽문도 마찬가지이다. 호기롭게 달려들던 상대는 곧바로 엽문의 주먹에, 발차기에 멀찌감치 나가떨어진다. 엽문은 자신의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면서 쓰러진 상대를 일으켜 세운다. 무예는 다툼이 아니란 것을 각인시키면서 말이다. 그런 ‘도’에 가까운 무예인 생활을 즐기지만 일본군이 불산을 점령하며 상황은 달라진다. 불산은 곧바로 전쟁의 고통에 신음하게 된다. 한때 큰 저택에서 여유롭게 살던 엽문 가족까지 쌀독 밑바닥까지 긁어야하는 불운한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미우라 대위는 엽문의 저택을 총독부로 접수한다. 무예(아마도 공수도)를 좋아하는 미우라 대장은 무예의 도시 불산의 무술인을 불러 모아 자신의 부하들과 대결시킨다. 이기면 쌀 한 자루씩 안겨주면서. 결코 무예대결에 나서지 않던 엽문은 자신이 아끼던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나가자 마침내 무예대결에 나선다. 1:10으로 부하들을 끝장내고 마지막엔 미우라 대장과 멋진 한판 승부를 펼친다.



엽문, 영춘권으로 역사를 쓰다


엽문이 펼치는 무예는 영춘권(詠春拳)이다. 영춘권은 엄영춘(嚴詠春)이란 여자가 창조해낸 무예라고 소개된다. 영춘권에 대한 유래와 전승에 대해서는 몇 가지 버전이 있다. 


1893년생인 엽문은 부유한 아버지의 저택에서 어릴 때부터 무예를 배웠다. 당시 짐작하겠지만 무술을 하여 돈을 벌겠다거나 K2격투기대회에 나가 세계챔피언 되겠다는 그런 공명심은 없다. 오직 신체를 단련하고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여하튼 엽문은 어릴 때 영춘권의 대가 진화순(陳華順)에게서 몇 수 배운다. 얼마 안 되어 진화순이 중풍에 걸리자 어린 엽문은 사형 오중소(吳仲素)에게서 본격적으로 영춘권을 사사받는다. 중국의 정세가 어수선할 때 엽문은 홍콩으로 건너왔고 그 곳에서 영춘권의 직계 인물 양찬(梁贊)의 아들 양벽(梁璧)을 만난다. 아마도 이때 엽문은 양벽에게서 영춘권을 마스터한 모양. 얼마 뒤 엽문은 불산으로 돌아와 장영성과 결혼한다. 엽문은 이후 불산에서 영춘권을 매일매일 익히며 기량을 높여간다. 그러다가 1938년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고 불산까지 점령당한다. 중국이, 불산이, 엽문집안이 고통 받기 시작한다.

 엽문이란 사람의 삶을 파고들면 들수록 정치드라마로 찍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민족영웅이라는 측면을 떠나 국공대결시기의 한 남자이야기로 말이다.


 엽문은 이 시절 불산의 부유한 상인 주청천(周清泉)의 도움을 받는다. 영화에서 임달화가 연기하던 인물이다. 엽문은 주청천의 어린 아들 주광유(周光裕)에게 영춘권을 전수한다. 이 시기 엽문의 행적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미우라 대장과 K2대결을 펼친다는 것은 영화적 창작이다. 영화에서는 엽문의 저택이 일본침략군의 본부, 총독부로 사용된다고 하지만 실제 엽문의 저택은 괴뢰 남해현(縣)정부가 차지한다. 엽문은 이 시기에 국민정부에서 일한다. (일본이 중국을 점령한 상태에서 국민정부는 유지되었고, 모택동(공산당)과 장개석(국민당)이 치열한 내전을 펼칠 때의 복잡한 이야기이다) 일본과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엽문은 국민당정부의 경찰국에서 근무한다. 그가 맡은 업무는 술집(기원) 세금수령, 군관학교 교관, 정보공작 등이었다. 1949년 대륙이 공산당에 의해 완전 점령되자 엽문은 어쩔 수 없이 홍콩으로 도피한다. 견자단의 영화 <엽문>에서는 영화 마지막에 엽문이 주청천의 도움을 받아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트럭으로 불산을 떠나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엽문 혼자의 야반도주였다. (정확히는 큰딸을 데리고 갔다) 이름도 한동안 바꾸고 홍콩에서 새로운 삶은 산다.


남겨진 아내와 아들은? 영화에서는 어린 아들 엽준만이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 둘째 아들 엽정도 있다. 아버지가 홍콩으로 떠나버리고 이들은 대륙 해방을 맞았고 공산치하에 살게 된다.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떠나간 뒤 이웃들의 차가운 눈초리를 받아야했다. 세상이 바뀌고 인심이 야박해진 것이다. 아버지 엽문은 홍콩에서 조금씩 영춘권을 퍼뜨리고 있을 때 중국에 남은 가족은 점점 더 불행해진다. 1961년 말에 엽문의 아내 장영성이 병으로 죽는다. (엽문은 홍콩으로 건너온 뒤 상해 출신의 여자와 동거/결혼한다)  그리고 엽준과 엽정 형제는 반우파 투쟁에서 화를 당하게 된다. 이들 형제는 홍콩으로 도망가기로 작정한다. (몇몇 홍콩영화에 등장하는데 당시 굶어죽기 일보 직전의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목숨 건 국경탈출을 시도한다) 마침내 엽준과 엽정 형제는 아버지 엽문과 재회한다. 13년 만에 말이다.


엽준과 엽문은 세상풍파를 다 겪었기에 아버지를 용서하였을 것이다. 새엄마를 ‘상하이 아줌마’라 부르면서 홍콩에 정주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도와 영춘권 도장의 사부로 활약한다.

엽문이 홍콩에서 도장을 열었고 불세출의 쿵푸스타 이소룡이 그의 제자라고 해서 그가 엄청 큰돈을 번 것은 절대 아니다. 견자단의 영화 <엽문>에서 엽준의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엽준은 영화제작 고문으로 이름이 오른다.

견자단은 리얼액션스타이다. 어머니가 태극권의 고수였기에 어릴 때부터 각종 무술을 섭렵한 인물이다. 견자단은 이 영화를 위해 9개월간 영춘권을 따로 익혔다고 한다. <엽문>이 중화권에서 빅히트를 칠 때 중문시사잡지 <아주주간>에서는 <엽문현상>을 커버스토리로 다룬 적이 있다. 견자단과의 인터뷰기사도 함께 실렸는데 흥미로운 질문이 있었다.


기자: 영춘권은 무공의 초식 외에도 철학가치가 있다고 하는데 당신의 견해는?

견자단: 나는 그러한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모든 문파의 쿵푸나 모든 나라의 국술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단계에 이르면 최절정의 부분에 이른다. 모두 깨우침이 있다. 모두 배울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이 때문에 내가 가장 중시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의 수련자세문제이다.


‘엽문’을 내세운 영화는 꽤 많이 만들어졌다. 견자단 주연 속편이 서너편 만들어지고, 프리퀄과 외전이 계속 만들어졌다. 왕가위 감독은 양조위를 내세워 <일대종사>를 찍었다. ⓒ박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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