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치아담스>에서 묻고 답하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의 질문을 보았습니다.
질문을 보자마자 감탄이 들었습니다.
"나에게 질문은 어떤 의미인가?"
"이 사람이 질문이 있나봐요" / 헌터
"병을 우스개 거리로 만드는 게 웃기다고 생각해요, 헌터?" / 의사
"질문이 있을 지도 모르죠, 살아 있잖아요" / 헌터
와우! 이런 질문을 만들어내다니 정말 선생님은 선생님인 듯 싶습니다. 영화를 보며 이런 통찰이 있고 이를 나누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질문은 알고자 하는 마음과 이를 얻기 위한 실천적 행동 두가지의 복합적인 결합이네요. 영화에서 <헌터>가 살아있으니 질문이 있을 수 있잖아요"라고 이야기했지만 살아있다고 하여 질문이 있다고는 볼 수 없겠습니다. 알고자하는 내적인 마음만으로는 질문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알고자하는마음"이 이를 얻기위한 행동 즉 "물음"으로 승화될떄 비로소 <질문>이 생산됩니다.
질문은 개인도, 사회도 건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성장도 질문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자기 스스로에게, 타인에게 질문하지 않는 개인은 조금의 성장도 담보하지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이해한 것, 이해하지못한 것을 질문을 하는 과정에서 정리하고 다시 피브백을 받고 다시 물어보고 다시 피브백을 받아보면 좋습니다. 어느 떄는 타인에게 물어보다가 스스로 정리가 되는 경험을 누구나 해 보았을 겁니다.
질문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질문을 막아버린 사회를 경험했습니다.
질문이 열려있어 발전과 소통 가능성을 기대했던 문재인정부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기득권이 되어 질문이 열려있지 않아 보입니다. 공고한 기득권, 고인 물은 썩씁니다. 전태일열사50주년에 과거의 <전태일>에게는 훈장을 주고 지금의 <전태일>들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으며 그들의 질문을 무시하는 정부입니다.
촛불로 탄생했기에 기대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에 기대조차 하지 않습니다. "기득', 이미 가진 권력의 질주는 "기득"하지 못한 이들의 질문을 허용할 리 없다는 건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으니까요. 이들이 못한 것이 무엇일까요? 입법과 행정을 장악하고 이제는 사법도 길들이려 하는 정부인데요. 그들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연코 안하는 겁니다.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거든요. "기득"의 입장에서는 유리한 것이 없기 때문이죠.
<질문>을 접하며 단어의 뜻, 나와 사회에 대해 조금은 돌이켜볼 수 있는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 너무 감사한 시간이었네요. 행복한 일요일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