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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혁 Feb 11. 2024

고상한 마음

2024년 2월 11일

그녀와는 전시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 주에 한 번씩 모여 전시를 보고 각자 후기를 나누는 모임이었다. 거기는 순전히 연애 목적으로 나갔다. 고상한 여자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동안 내가 만난 여자들은 다 비슷했다. 솔직하다는 핑계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타입. 술담배를 즐기고, 감정의 변화나 표현이 극단적이고, 스킨십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녀들은 무엇보다 지루한 관계를 못견뎠다. 한 달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다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이별을 통보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나는 늘 그런 여자들만 만나왔다. 그런 타입의 여자를 전부 고상하지 못한 여자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반대의 여자를 떠올려봤더니, 그런 결론이 되어버렸다. 고상한 여자를 만나보고 싶다, 라고.


물론 그건 나의 편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의 인생에서 벌어진 일과,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을 타인이 구분하기란 몹시 어렵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이 편견이라는 의견은, 편견이 아니라는 의견과 동일선상에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입을 가리고 희미하게 웃었다. 고상한 웃음 같았다.

“선배는 평소에 그런 생각을 하는군요?”

“이상하지?”

“신기해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게 선배라는 말 때문인지, 신기하다는 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벌써 십 년도 넘었는데, 선배는 무슨, 한 살 차이 가지고.”

“그런가요?”

“말 편하게 해도 돼.”

“선배, 옛날에도 그랬던 거 알죠? 말 편하게 하라고.”

“그랬어?”

“혹시 그때 나한테 관심 있었어요?”

“글쎄.”

솔직히 말하면 대학 시절에는 그녀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애매하게 대답했다.

“아무튼 그때도 말 편하게 안했지?”

“몰라요. 난 그게 좀 어려워요. 그리고 자주 봐야 말을 편하게 하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내 번호를 물었다. 우리는 주말에 만나 이태원의 재즈 클럽에 갔다. 술을 마시며 각자의 인생에 대해 길게 이야기했다.


대학 시절 얼굴만 알던 후배를 십 년 뒤 모임에서 우연히 만난다. 나는 그런 일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환상적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그런 우연은 굳이 규정하지 않을 뿐, 일상에서도 숱하게 많이 겪는다. 아니, 그런 걸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연이 아니다. 내 생각에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일은 팔차선 도로에서 덤프 트럭에 치여 죽는 일과 비슷하다. 언제든 쉽게 벌어질 일은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마음만 먹으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녀는 끝까지 말을 놓지 않았다. 일 년을 만나고, 헤어지는 순간에도 그랬다. 내가 이별을 통보했을 때도 그녀는 고상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오래 생각하고, 말을 골라서 했으며, 충분히 나를 존중해주었다.

“그래요. 그렇게 하죠.”

그녀는 마치 노련한 팀장처럼 그렇게 대답했다. 그것 때문에 나는 더 슬퍼졌다.

“그렇게 하자니. 그게 다야? 더 하고 싶은 말은 없어?”

“헤어지자는 사람을 붙잡고 굳이 마음쓰고 싶지 않아요. 서로 힘들 뿐인데.”

“그건 그렇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덕분에 헤어진 뒤에 오히려 그녀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어떻게 마음이 그렇게 깔끔하게 떨어져 나갈 수 있을까? 나는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오랫동안 다양한 것들을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별을 결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이유가 없는 게 이유가 됐다. 그러니까 뚜렷한 이유가 없음에도 헤어지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게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역시 흥미롭게 들어주었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정말 그런게 이유가 될 수도 있겠네요.”

나는 그녀의 생각이 궁금했다. 헤어지자고 한 건 난데, 내가 더 힘든 거 같아. 너는 왜 항상 그렇게 태연한거야? 그러나 너무 무례한 질문 같아서 꿀꺽 삼키고 말았다.

“오빤 정말 이상한 생각을 많이 하네요.”

“그런가.”

나는 살짝 어지럼증을 느꼈다. 

“그만 가자.”

“한 잔만 더 마시고 가요.”

우리는 달위니를 한 잔씩 더 주문했다.

“참, 집에 오일 클렌저 없죠?”

“늘 쓰던 그 노란 거 말이지? 사놨어.”

“고마워요.”


우리는 이별한 뒤에도 사귈 때와 비슷한 빈도로 만났다.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우리집에 둔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 왔다. 이후로 별다른 용건도 없이 매주 만남이 반복되고 있었다. 헤어지기 전에 자연스럽게 다음주의 약속을 잡는다. 약속이 있으면 그 다음 주로. 이상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사이는 달라진 게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밥을 먹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술도 한 잔 마시고, 우리집에서 잤다. 그녀는 딱 한가지만 확실하게 했다.

“각자 애인이 생기면 그만두는 거예요.”

“당연하지.”

물론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 이렇게 만나는 게 당연한 일일까? 그건 아니었다. 그런 관계를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나는 몰랐다. 아니, 나는 외로움 탓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왜? 그녀는 외모든, 성격이든, 직업이든 여러모로 정말 좋은 사람이었고, 내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만날 사람이 많았다. 그럼에도 계속 나를 만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 걸 사랑이라고 하는 건가? 아니, 사랑은 아닐텐데. 그럴리가 없는데.


그런 관계가 육개월쯤 됐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혹시 이런 게 사랑일까? 우리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이번에도 역시 한참을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아니요.”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치 갑자기 연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망연해졌다.

“어째서?”

“잊었어요? 우리 헤어졌어요.”

“내말이. 헤어졌는데도 계속 만나고 있잖아.”

“그만해요.”

그녀는 일어나서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불안해져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뭐해?”

“집에 가려고요.”

“갑자기?”

“네.”

“잠깐만 얘기 좀 하고 가.”

그녀는 내 손 위에 손을 얹더니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우린 연인이 아니에요. 난 가고 싶을 때 갈 자유가 있어요.”

맞는 말이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조금 화가 났다.

“나도 알아. 알지. 맞아. 네 말은 항상 맞아. 그런데 왜, 넌 항상 그렇게 태연한 거야? 한 번도 내 앞에서 흔들린 적이 없어. 그래... 그래서 그랬을지도 몰라. 너는 항상 나한테 친절하고, 잘해줬어. 편하고 좋았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늘 답답하고 불안했어. 난 너의 진심을 원하는 데, 한 번도 그걸 본 적이 없는 느낌이야. 같이 있을 때도 껍데기랑 있는 기분이었다고. 네가 갖고 있는, 네 안에 있는 진짜 에센스 같은 걸 나는 절대 느끼지 못할 것 같았어. 그게 너무 두려웠어. 그래서 헤어지고 싶었는지도 몰라. 아니, 헤어지자고 말하면 그때는 그걸 볼 수 있을까, 평소의 너와 다른 모습, 흔들리거나, 화나거나, 아프거나, 슬프거나 한, 그런 걸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랬나 모르겠어. 하지만 아니지. 지금까지도 계속 마찬가지야. 너는 늘 한결 같고 똑같아. 그게 참 멋져보이면서도 결국은 그게 다일까, 하는 의문이 사라지질 않는 걸. 난 계속 그걸 끊어내려고, 떨쳐내버리려고 너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나는 울고 있었다. 몸안에서만 울렁거리던 감정이 몸밖으로 흘러나온 느낌이었다. 그녀는 나를 침대에 앉히고 그 옆에 앉아서 내 등을 토닥였다. 나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녀는 그 모든 시간을 다 기다려준 뒤에, 내가 괜찮아보이자 말을 꺼냈다.

“미안해요.”

나는 다만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서 간절히 그런 눈길을 보냈다. 그녀는 그걸 알고 한마디 덧붙여 주었다.

“우린 좀 다른 거 같아요.”

그게 다였다. 집으로 돌아간 그녀는 나를 차단하고 두 번 다시 만나주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두 명의 여자를 더 만났다. 그녀들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험담을 좋아하고, 지하철에서 냄새나는 어른을 보면 불평하는 사람들. 아무한테나 성적인 농담을 스스럼없이 하는 사람들. 늘 그랬듯 한 달 정도씩만 사귀었다. 때가 되면 그녀들은 기다렸다는 듯 내게 작별을 고했다. 우린 좀 안 맞는 거 같아. 그런 이유였다. 그러면 나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맞아, 그런 면이 좀 있지. 그래, 맞지? 다음에는 나보다 더 잘 맞는 사람 만나. 그녀들은 그렇게 말하고 내 곁을 떠나갔다. 나는 슬픈 척을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슬픈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그런 걸 은근히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또 한 편으로는, 이상한 말일 수도 있지만 안심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르다고. 그래도 나는 고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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