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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준혁 Feb 07. 2024

선택

그녀가 물었다.

“여행 별로 안 좋아하지?”

나는 잠깐 생각해본 뒤에 대답했다.

“맞아.”

“좋아, 1점?”

“아니, 좀 그래. 직감이라기엔 너무 단순하잖아? 세상에 여행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불을 치우고 침대에서 일어나 옆에 놓여있던 반소매 티셔츠를 입었다. 끝단이 허벅지 중간에서 멈췄다.

“배고파. 뭐 좀 먹으면서 하자.”

“그래.”

나도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 부엌으로 나섰다.

냉장고에서 식빵 두 쪽을 꺼내 토스터기에 넣었다. 딸깍. 버터와 베이컨과 계란 두 알을 꺼냈다. 팬에 버터를 두르자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향이 풍겼다.

그녀는 계속 고민 중이다. 나에 관해 맞추는 게임.

“할머니 쪽이 신기가 있거든.”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직감으로 맞출 수 있다나 뭐라나. 그게 진담인지 농담인지 잠깐 고민했지만, 실은 상관없었다. 아리송하게 말하는 게 그녀의 매력이니까.

딸깍.

넓적한 그릇에 토스트를 놓고 꿀을 조금 부었다. 에그 스크럼블과 베이컨은 오목한 그릇에 담아냈다. 그녀는 식탁에 앉아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진짜 맛있다.”

“다른 요리를 훨씬 더 잘해.”

네가 그걸 먹을 일은 없겠지만,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이후로 그녀와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도 직감일까? 아니, 직감이라기보다는 학습의 결과라고 하는 게 맞겠다. 그동안 여자들은 나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줬다. 그들을 통해 학습된 예감으로, 내가 어떤 말을 어떻게 해도 그녀는 두 번 다시 나를 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쓸모는 오늘로 끝이니까.

그녀는 베이컨과 토스트를 우적우적 씹으며 속사포처럼 말했다.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아.”

“좀 애매한데?”

“게임을 좋아하고.”

“컴퓨터를 보고 알았겠지.”

“운동을 좋아하지만 남들과 협동하는 운동은 싫어해.”

“그건... 그렇기는 해.”

“이 세상에 존경하는 사람이 없어.”

“땡, 틀렸어.”

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곧바로 대답했다.

“자기자신을 존경한다는 말이지?”

“.......”

이건 좀 신기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렇지만... 그럴 수 있지. 대단한 일은 아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하룻밤 정도 대화를 나누고 그정도쯤은 알아낼 수 있다. 나는 2점을 인정해주려 했다. 그때,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어릴 때... 학교 다닐 때...... 뭔가 심하게 안 좋은 일이 있었지?”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웃었다.

“그만하자. 재미없어. 1점으로 끝.”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눈을 감고 미간을 찡그리며 말을 이었다.

“뭔가 차갑네. 바다였나보다. 음... 영웅 놀이 같은 걸 하다가... 누가 죽었구나?”

나는 벌떡 일어나서 그녀 앞에 있는 그릇을 잡아챘다. 그리고 개수대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만 가.”

그녀는 뾰루퉁한 표정을 하더니, 들고 있던 포크를 농구선수처럼 던졌다. 포크는 멋진 호를 그리며 개수대에 착지했다. 나는 포크가 와장창, 소리내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녀는 머리 위로 티셔츠를 벗고 대충 던져놓은 후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고무장갑을 꼈다가, 다시 벗은 뒤에 설거지를 했다. 스펀지에 주방세제를 묻히고 흐르는 물에 그릇을 닦았다.

소문은 몹시 빨랐다. 그날 그 녀석이 바다에 떨어지는 걸 본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래서 불필요한 오해가 생겼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냥 넘어갈 일이었다. 수학여행 중에 벌어질 수 있는, 어떻게 보면 흔한 사고. 그러나 녀석의 어머니가 끝까지 나를 물고 늘어졌다. 내가 그렇게 한 거라고, 절벽에서 밀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모두가 사고라고 했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확고했다. 학교에 대자보를 붙이고, 다니는 학원마다 쫓아와 말썽을 부렸다. 녀석이 쓴 일기라며 찌라시를 뿌리기도 했다. 친한 친구인 척 했지만 사실은 나를 정말 싫어했다고. 한심하고 멍청하고 이기적인 놈이라고 욕하는 내용이었다. 나중에는 나자신조차 헷갈렸다. 정말로 내가 그 친구를 절벽에서 밀었을까. 혹시 그런 건 아닐까. 우리가 정말 친한 친구였다는 건, 그저 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착각이 아닐까. 기억이라는 얄팍한 종잇장 따위 조금만 힘을 줘도 찢어져버릴텐데. 그렇다면 모든 게 결국은...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가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젖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주위로 작은 물방울을 날렸다.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욕실에 들어갔다. 물을 틀고 십 분 정도 가만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자. 지난 일인 걸. 이미 오래 전에. 벌써 십오 년이나...

면도를 하고, 머리를 감고, 트리트먼트를 묻힌 채로 양치를 하고, 몸 전체를 깨끗이 닦아냈다. 뜨거운 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등줄기를 지나 다리를 거쳐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하수구를 중심으로 물길이 빙글빙글 돌면서 고일 듯 하다가 빠져나갔다. 고일 듯 말듯 물은 흘러가는 것이다.

밖으로 나와보니 그녀가 없었다. 역시 그렇다. 예상대로 그녀는 떠났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마셨다. 냉장고가 고장이 났나? 맥주가 너무 미지근하다. 문득 식탁 위를 보니 메모가 하나 놓여 있었다. 나는 그걸 유심히 봤다. 영어인가? 아니다. 뭘까, 이 언어는... 나는 그녀가 남긴 메모가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그렇지만 알 수 없었다. 뭐라고 쓴 건지, 끝내 알지 못했다. 나는 그 사실에 감동하고 말았다. 그러지 않고서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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