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준혁 May 11. 2024

헤엄

귀에서 소리가 난다. 부스럭부스럭 거린다. 작고 부드러운 먼지가 솜털 위를 굴러다니는 것 같다. 면봉으로 파내도 나오는 건 없다. 계속 파내도 나오는 건 없다.

물이 들어간 줄 알았다.


수영장은 넓고 깊었다. 다양한 사람이 오갔다. 남자, 여자, 어린아이, 노인, 비키니를 입은 젊은 여자와 잠수복을 입은 늙은 남자. 웃고, 울고, 붉고, 발그레진, 그리고 누런이를 드러내고 미소 짓는 사람들. 내게는 들리지 않는 언어와 외침들.

나는 헤엄칠 줄 모른다. 수경을 끼고 잠수했다. 몸을 가로로 길게 뻗고, 다리를 힘차게 흔들었다. 앞으로 나아가려 애썼다. 그러나 계속 제자리에 머물렀다. 물 속에서 나는 무능했다. 도리없이 물 밖으로 나왔더니 귀가 먹먹했다. 귀를 당기고 흔들어서 물을 빼냈다. 그래도 여전히 귀가 이상했다. 소리가 난다. 부스럭, 부스럭.

물이 아닌걸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10킬로미터를 달렸다. 그래도 귀는 여전했다. 물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샤워를 하고 책상에 앉아 생각해봤다. 모르겠다. 송곳으로 귀를 파볼까? 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짓까지 해야할까? 소리가 들릴 뿐이다. 아주 작고, 성가신 소리. 무시해버릴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늘 자신은 없다. 하지만 애초에 자신감이란 성실한 자기 최면이나 빗나간 오해일 뿐이지 않나? 아닌가? 그래, 나는 때때로 지나치게 비관적이다.


퇴직 연금은 마이너스 10퍼센트. 전셋집 재계약은 5개월 남짓. 계좌 잔액은 40만 원. 숫자로 계산하는 인생의 보폭. 영리한 친구는 마이너스 통장으로 투자해서 수익을 얻는다. 내 돈은 한푼도 안 들어. 가만히 앉아서 내 신용으로만 돈을 버는 거지. 으흠, 그렇구나.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빈다. 부스럭부스럭. 그러나 나오는 건 없다. 사람들은 카페에 앉아 8천 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2만 원짜리 샌드위치를 먹고, 교양 있는 미소를 짓고, 세심하게 인생을 측량한다.

친구가 결혼식 사회를 부탁한다. 비용은 신혼여행지에서 사올 고급 와인 한 병이란다. 그러면 축의금은 내지 않아도 될까? 그건 또 다른 문제인가? 안 내면 혹시 서운해할까? 하지만 그가 마이너스 통장으로 버는 돈에 비하면 축의금 따위 우습다. 다른 지인에게 돈을 빌려서 결혼식 축의금을 내고, 사회 보답으로 받은 와인을 당근으로 팔아서 빌린 돈을 갚는 건 어떨까? 그러면 모든 게 해결된다. 균형을 맞출 수 있다. 균형 잡힌 삶. 그러나 그것도 균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영원히 제로로 돌아가는 삶을. 친구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묻는다. 너는 결혼 생각 없어?

결혼?


수영장에서 본 부부가 떠올랐다.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 남자는 잠수복 같은 걸 입었다. 안색은 칙칙하고 주름은 깊다. 뱃살은 늘어졌고 허벅지는 실패한 밀가루 반죽 같다. 여자는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비키니 차림이다. 키가 크고 날씬하지만 움직임은 둔하다. 가슴은 크고 얼굴은 조막만하다.

남자는 물 밖보다 물 속에서 훨씬 편안해보인다. 물개처럼 수영을 잘하기 때문일지도. 육중한 덩치로 사람들 사이를 재빠르게 지나친다. 여자는 애초에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내내 선베드에 누워있다. 핸드폰을 보고, 사진을 찍고, 사람들을 구경한다.

나는 물에 떠있다. 헤엄치지 않는다. 가만히 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깊은 물도 아닌데 바닥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갑자기 겁이 난다. 물 밖으로 나가려다가 문득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여자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고나서 죄책감의 경위를 알 수 없어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여자는 상체를 들어 꼿꼿하게 앉는다. 입을 움직인다. 소리는 내지 않는다. 나는 여자의 입모양만으로 그게 어떤 말인지 유추해본다.

뭘 봐? 너 따위가 감히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말했을리 없다. 입모양을 다시 읽어본다.

최근에 먹는 비타민이 효과가 정말 좋아요. 아기 피부처럼 보송보송해졌어요. 머릿결도 좋아졌구요. 놀라지 마세요, 가슴도 커진답니다!

거짓말이다. 아니, 거짓말이라기보다 그런 말은 그냥... 광고일 뿐이잖아? 정말로 그럴 수 없다는 걸 다 알잖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여자의 입을 다시 본다.

내가 왜 저 남자와 결혼한지 알아? 너 같은 놈이 그런 걸 이해할리 없지.

뭐라고?

송곳으로 귀를 찔러버려.

여자는 씩 웃는다. 선글라스를 쓰더니 다시 선베드에 누웠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귀를 후볐다. 귀에 물이 들어간 것 같았다.


아직 결혼 생각은 없어. 친구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급할 것 없지. 누구나 자기만의 삶이 있는 거니까.

자기만의 삶.

나는 사회를 맡기로 한다. 축의금을 빌려줄 것 같은 지인들의 리스트를 떠올린다. 당근에 올릴 글도 생각해본다. 얼마 전에 신혼여행으로 다녀온 휴양지에서 산 비싼 와인인데, 술을 끊으려고 헐값에 넘겨요. 네고 가능하니 연락주세요. 고마워, 결혼식 때 보자. 응, 그래. 친구는 커다란 외제차를 타고 신혼집으로 떠난다. 나는 내가 사는 원룸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을 걸으며 생각한다. 수영장에 가기 싫다. 귀에 물이 들어간 것 같다. 아니, 물이 아닐 수도 있는데 아무튼 뭐가 들어간 기분이다. 뭐가.

귀가 이상하다. 자꾸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부스럭, 부스럭.

부스럭.



매거진의 이전글 선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